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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미 Oct 14. 2024

살기 위한, 의미와 역할을 연결하다

그냥 제주살아요 ; 박물관에서 더듬어 찾은 제주역사 연결고리 ‘전복’

박물관 소장품에 대한 기획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생각보다 일이 커졌음을 직감했다. 그 많은 것들 중에 의미를 없는 것은 없을 터. 뭐가 더 중하고 덜 중한지는 무엇을,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심지어 쉬운 것도 없다. 나름 박물관의 성격을 살피고 작은 것들, 생각없이 지나가 놓치는 것들에 집중했다. 그럼에도, 뭔가를 쓰려고 할 때마다 따라 붙는 설명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만큼 고민이 크고, 미련도 큰 작업이다.

우연히 읽은 책에서도 같은 고민이 읽혔다. <박물관의 글쓰기>란 제목이었다. 정확하게는 ‘박물관의 글’쓰기다. 박물관에서의 글은 소장품 정리나 기획전 같은 것을 할 때의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을 쓴다기 보다 읽을 사람들의 눈과 가슴 높이를 맞춰야 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어떻게 쓰면 되는 거야’ 살폈더니 의외로 간단하다. ‘짧고 명료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그리고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쓰다보니 이번 작업이 힘들었다는 하소연이 됐다.

        


국립제주박물관의 상징성


박물관에 있어서 소장품(유물)은 단순히 박물관을 상징하는 역할이 아니라 박물관이라고 부르는 공간을 의미심장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특정한 시점에 완료돼 박제화한 것이 아닌, 과거를 존중하면서 사회문화적 가치와 문화적 진화의 과정을 품고 있는 지식 이용 도구로 역할을 수행한다. 

국립제주박물관의 구성 역시 소장품과 밀접하다. 제주의 탄생부터 탐라국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선사실’과 ‘탐라실’, ‘탐라순력도실’은 다른 박물관에서는 찾을 수 없는 공간이다. ‘고려실’과 ‘조선실’ 등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제주가 겪었던 변화와 당시의 삶을 살필 수 있는 자료들로 국립제주박물관의 존재 이유를 드러낸다.     

국립제주박물관 안에는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전복’이다. 전복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제주도 서귀포층 패류 화석(천연기념물195호)에서 약 200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복 화석이 출토됐다. 가공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중에서는 대정읍 하모리 유적(신석기)에서 발견한 ‘뭔가 만들다가 둔’ 전복 껍질이 가장 앞선 시기의 것이다. 성산읍 신천리 한못궤굴 유적(신석기 후기~청동기)에서 나온 전복 껍질류는 앞선 것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 용도를 추정할 수 있는 수준이다.




생활과 밀접한 '도구'를 만들다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탐라전기 유적에서는 구체적인 도구가 등장한다.

애월읍 곽지리 조개무지에서 발견된 전복칼(鰒殼刀‧Abalone Knives)은 한못궤굴 유적과 달리 껍질의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이용하기 위해 약 3분의 1정도를 잘라내는 등 간석기(날 부분 또는 표면 전체를 갈아 만든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에 주로 사용된 석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날로 사용된 반대쪽에는 끈을 묶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2개의 구멍이 나 있다. 구멍을 통해 끈을 묶게 되면 단순히 손에 쥐어지는 전복칼보다는 힘의 강약 조절이 쉬워진다.

곽지리 유적보다는 앞선 시기인 김녕 궤네기동굴에서도 전복껍질로 만든 화살촉(鰒殼鏃 Abalone Arrowheads) 30여점이 발견됐다. 전복화살촉은 김녕 궤네기동굴 외에는 등장한 적이 없다. 김녕 궤네기동굴유적은 집터 유적으로, 전복껍질 화살촉은 껴묻거리용이거나 의례용이 아닌, 실생활에 직접 사용한 생활용구로 해석하기도 한다. 시기상 초기 철기 시대이기는 했지만 제주에서는 철을 활용하기 쉽지 않았고, 화살촉을 만들기에 적당한 돌도 흔치 않았던 상황이 나름의 문화를 만들었다.     

탐라, 전복의 쓰임을 바꾸다     

이후 전복을 재료로 한 생활도구가 사라진 그 배경에는 탐라의 활발한 해상 활동이 있다. 대신 교역물품으로 쓰임이 달라졌고, 교역을 통한 도구와 제작 기술의 유입으로 대체됐다.

우리나라 고문헌에 등장하는 제주 전복 관련 정보는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의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조 제주의 주요 물산 목록에 정도다.


고대 해상왕국 탐라의 흔적


흥미롭게도 고대 일본 관련 기록 속에 제주 전복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해상을 통해 활발한 교류 활동을 해 온 고대국가 탐라의 역할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1963년 일본 나라현 헤이죠쿠(平城宮) 터에서 나온 목간에서 ‘시마코쿠나키리고우(志摩國名錐鄕)에서 탐라복(耽羅鰒) 6근을 선물로 조정에 바쳤다’는 내용이 발견된다. 목간 뒷면에 쇼무(聖武) 천왕의 연호인 ‘덴표(天平) 17년(745년)’ 이라고 쓰여 있어 시대를 추정할 수 있다.

일본 역사가인 아미노 요시히코는 헤이안 시대(794~1192) 법령집 『연희식(延喜式)』권24, 주계(主計) 상(上)의 조(調)와 관련된 기록에서 “비후국(현 규슈 구마모토현 일대) 탐라복 39근, 풍후국(현 규슈 오이타현 일대) 탐라복 18근”이라는 구절을 확인했다.

일본 천평(天平) 10년(738)에 작성된 「주방국정세장(周防國正稅帳)」에도 ‘탐라방포(耽羅方脯)’라는 탐라산 특산물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특히 탐라도인(耽羅島人) 21명의 존재도 기록하고 있다.    

 

해녀 고달픈 삶 상징, 그 다음     


쓰임이 달라졌지만 전복의 역할은 여러 의미로 제주 사람들의 삶과 밀착됐다. 식량, 생활도구, 교역품에 이어 진상품으로 전복은 수탈과 고달픔의 상징으로 척박한 섬 생활을 상징했다고 할 수 있다.

제주해녀의 역사 속에 그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조선시대 해녀는 주로 미역과 같은 해초를 채취했으나, 전복을 따던 포작인들이 관리들의 착취를 피해 도망을 치는 등 수가 줄어들자 17세기 후반 들어 해녀에게도 전복 진상의 임무가 부여된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세조 때(1455∼1468년)의 제주목사 기건은 해녀들이 전복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겨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다.

정조는 1776년 5월 "잠수하는 여인이 포작한 것을 서울에 바칠 때 간사한 꾀를 써서 물가를 올리는 폐단을 준엄하게 금하겠다"며 해녀의 고통을 헤아렸다.

오래 해녀 취재를 하면서 싫어진 작업 중 하나가 해녀의 수를 세는 일이다. 처음 해녀의 수를 헤아린 것은 그들이 잡아 올릴 전복의 수를 가늠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에도 비슷했다. 달라진 것이라곤 그들에게 걷을 세금 규모를 파악하고 우리나라에서 강탈할 것들을 살피기 위함 정도라고나 할까.

지금은 해녀들이 직접 채취한 자연산 전복을 귀한 식재료로 여긴다. 역사 속에서 돌고 도는 것은 위대한 유산만이 아님을 박물관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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