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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주 Feb 05. 2022

사랑받을 만한 사람

엘사의 왕국을 보며

좀 다듬고 덧대서 책에 싣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글. 스타벅스에서 저녁을 거른 채 이걸 쓰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던 추운 저녁날이 기억난다. 다시 읽고, 또 내가 나한테 위로받음 -_-;



<겨울왕국>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조카에게 엘사 인형을 선물해주고 역할 놀이를 하다가, 영화를 보지도 않은 내가 너무 유려하게 잘 놀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보고 떠들어준 덕에 귓등으로 들은 것만 한 트럭이라 나도 본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 엘사인 조카의 명령에 맞춰 올라프의 임무를 무한반복하다가, 갑자기 결말이 궁금해졌다. 엘사가 눈보라를 불러오고, 왕국이 얼음에 갇히고, 안나가 저주를 풀려고 애쓰고, 올라프가 잔망을 떨고,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누가 누구를 해치고 누가 누구에게 구원되는 거지?

 

겨울왕국2가 또 한바탕 이 겨울을 휩쓴 마당에 그래서 나는, 무려 6년 전(...)에 개봉한 겨울왕국1을 IPTV에서 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무료더라고. 익숙한 얼굴들, 익숙한 노래들, 익숙한 대사들이 쭉쭉 지나가고 이제 슬슬 대망의 '레리꼬'가 나오려나 팔꿈치를 긁으면서 보고 있었는데.

 

레리꼬가 그렇게 아름다운 장면인 줄을, 나는 정말로 몰랐다. 애써 감추고 통제해왔던, 자신의 '긍정적이지 않은 면'을 처음으로 아무 제약 없이 대면하게 되는 상황. 엘사의 '얼려버리는' 마법은 풍부하고도 정확한 은유다. 인간이 '그저 가지고 태어났으나' 세상에 수용되기 어려운 것들에 대한 은유. 누구나 그런 면이 있지만 되도록 티내지 말도록 교육받아온 것들. 분노나 우울, 결핍 또는 과잉, 불경하며 불손한 생각들, 온갖 기벽과 악취미. 우리는 그것들을 통제할수록 성숙해진다고 배우며, 세련되게 통제하는 사람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Let it go를 외치며 사방팔방에 얼음을 쏘고 눈보라를 일으키는 엘사의 표정과 동작은, 과연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저렇게 복잡한 감정을 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인간 내면의 다층을 포착한다. 세계의 질서와 시선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의 폭발력, 이런 자유를 모르고 억눌렸던 시간에 대한 연민과 억울함, 그러나 자기 자신조차 알 수 없는 한계에 대한 불안감, 자신이 선한 존재가 아님을 마침내 인정함으로써 느끼는 후련함과 체념, 그리고 이 모든 황홀경의 대가가 '사랑을 포기하는 것'임을 아는 자의 고독까지.

 

이 장면에서 엘사는 헤어스타일과 의상, 메이크업이 전부 바뀌는데 영화 전체를 통틀어, 아니 디즈니의 모든 여성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매혹적이다. 그야말로 이기적으로 아름다워서, 그 어떤 잘난 파트너가 와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길고 곧게 뻗은 몸과 도도한 목선은 타인의 손끝 하나라도 닿으면 치명적으로 훼손될 것처럼 완벽하다. 역대 디즈니 공주 중에 (아마도) 가장 큰 키에, 역대 디즈니 공주 중에 (아마도) 가장 높은 힐로 완성되는 고혹적인 걸음걸이는 그 누구의 '동행'도 허락하지 않는다. 독보적으로 아름답다는 사실 자체가 엘사를 '사랑 밖으로' 배제하는 장치처럼 느껴질 정도.

 

하지만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수많은 인간이 말해왔다. 이 영화도 (1편만 본 입장에서) 결국에는 그렇게 말한다. 사랑이 엘사를 녹이고 구출한다. 엘사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와, 감정을 조절하고 힘을 통제한다. 통제된 능력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만 쓰인다. 해피엔딩. 모두에게. 돌아온 엘사는 편안하고 온화하고 그래서 사랑스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게는) 덜 매력적이다. 사랑을 받을 만하여 사랑받는 인간. 우리가 바라는 인간. 그래서 우리들 곁에 있는 인간.

 

영화의 표면적인 메시지와 무관하게,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오래된 화두를 또다시 던졌다. 인간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 다듬어진다. 인간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을 사랑한다. 영화의 맥락을 감안해서 말한다 해도, 그 진실한 사랑(true love)이란 결국, 한 인간을 사랑받을 만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물론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을 리가. 하지만, 우리가 도저히 만질 수 없고 닿을 수 없는 곳에, 우리가 나누는 교감 너머에, 그 자체로 완벽히 아름답지만 더불어 위험하여 타인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고독이 있다. 나에게도, 물론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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