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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주 Sep 13. 2023

우리의 고유한 불행

건강을 되찾으면서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에게 꼭 말한다. “나 진짜 죽다 살아났어요!” 느낌표까지 붙여서 우렁차게 말하는 이유는 혹시나 그들이 내가 겪었던 우울증을 ‘그냥 좀 우울했던 것’으로 치부할까 봐.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상대의 눈을 살핀다. 내 말을 알아들었나요? 허풍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나요? 잠시의 간격을 두고 상대방들은 대답한다. 실은 우리 엄마도 우울증으로 고생하셨다고. 내 남편도 작년부터 약 먹고 있다고. 내 딸도 수년간 병원에 다닌다고. 또는 나도, 오래된, 우울증이 있다고.


우울증이 드물지 않다는 과학적 통계와는 또 다른 차원의 실감이 반복된다. 이렇게 많다니. 많아도 많아도 이렇게나 많다니. 흐린 데 없이 씩씩하고 유쾌한 E선배조차. “남들 하는 건 또 내가 안 해볼 수 없잖아?” 눈꼬리를 한껏 구기며 웃음 짓는 선배를 한참 바라본다. 저 눈가에 한동안 머물렀을 사막 같은 시간을 나는 이제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나의 우울증을 털어놓음으로써 넓어지는 세계가 있고, 그 너비는 나를 혼자 불행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불행이 홀로 있지 않으면 그것은 견딜 만한 불행이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저 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하게 묶이는 것은 아니다. 우울증은 각자의 이유로 발현되고 각자의 양상으로 전개되며 각자의 해법으로 치료된다. 혹은 치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한 사람의 성질에 ‘기여’한다. 기여한다고 말하는 건, 내가 나 자신과 주변의 우울을 통해, 한 사람이 자신의 우울에 패배하지 않고 그것을 이리저리 다루어 삶의 안쪽으로 끌어안는 방식의 아름다움을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우울을 일종의 불행이라 할 수 있다면.


저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비슷비슷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불행하다는 말. 가정을 사람으로 바꾸고. 과거에 이 문장에서 불행의 무한함을 읽었다면 이제는 명백히 불행의 고유함을 읽는다. 나만의 것. 나를 나로 만드는 것. 세상의 불행이 서로 일치하는 법 없다면, 각자의 삶에 독자적인 형태와 색채를 입혀주는 것은 불행이다. 행복이 아니라. 우울도 그럴 것이다. 자신의 우울을 잘 매만져온 사람들에게선 고유한 격조가 느껴진다. 이는 애초에 우울의 밀도가 낮았던 이들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매력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를 엎드려 울게 하는 우울을 일종의 불행이라 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을 마주한다는 건 내게, 그의 불행을 응시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다. 내가 당신을 건성으로 보는 게 아니라면, 나는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개별적인 불행을 본다. 그 불행에 깔려 죽지 않은 당신의 고유한 용기를 본다. 불행 속에서도 밥을 지어 먹고, 불행 안에서도 몸을 씻고, 불행 아래서도 하루의 불을 켜고 이불을 정돈하는 당신의 고유한 성실을 본다. 불행한데도 담벼락에 침을 뱉지 않고, 불행하지만 행인에게 고성을 지르지 않고, 불행할지언정 자신을 불행 이상으로 망가뜨리지 않는 당신의 고유한 위엄을 본다.


남들 하는 불행은 해봐야 한다는 E선배의 단점은 가끔씩 다리를 떤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습관이지만 그 정도는, 자신의 불행을 자신의 고유함으로 단련해온 인간에게 허용되는 수준의 흠일 것이다. 내 친구 P가 약속시간에 자주 늦는 것, S가 유난히 입이 험한 것, H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종종 잊는 것도. 그들이 자기 인생의 무겁고 유일한 과제를 해나가느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흠들을 나는 어느 순간, 기꺼이 양해하게 된다. 당신의 흠을 쉽게 흉볼 수 없게 된다. 당신을 잘 알지 못하는 만큼 당신에게 너그러워진다. 내가 지나온 우울이, 또는 불행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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