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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Dec 29. 2023

망치와 논술학원 강사

경제학자가 '시공간압축'을 이해 못하는 이유

자 이번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드디어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자본의 한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글을 쓰면서도 저는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책에 대한 책을 쓰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거든요. 그 책은 그 책 자체의 고유성(authenticity)를 가지고, 독자를 만나야 합니다. 저는 '자본의 한계'는 몇 번을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무슨 챕터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모두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이 글을 읽었다면 '자본의 한계'의 구조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이해할만한 용기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도 마찬가지에요. 그냥 바로 하비의 저작을 읽기 시작하면, (심지어 하비의 문법에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저 조차도) 금방 난관에 부딪칩니다. 하비 교수가 언급하는 수많은 철학자들과 문학자들, 영화와 소설들의 내용을 잘 모르면, 길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저는 이 책을 다시 읽었는데, 아마 데이비드 하비에 대한 책을 쓰려고 마음 먹지 않았다면, 아마 절대 다시 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러나, 책을 읽고 보니, 하비 교수의 박식함에 놀라게 되고, 또 정교하게 쓰여진 문장들에 감탄하게 됩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시공간 압축'에 대해서 쉽게 얘기하는데, 그 과정을 논리적으로 이어 붙이기 위해서 하비 교수가 엄청나게 분투(struggle)했구나 하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 글은 드디어 이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사실 이미 이 책의 논지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얘기했기 때문에 별다른 정리가 필요할까 싶지만, 쓸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이 책을 바라보게 된다는 점도 저자로서 흥미롭습니다. 사실 지난번 글을 쓸 때만 해도 '방시혁과 뽀로로'가 등장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한국의 2020년대를 살고 있는 저는 저의 어린 시절 경험(experience)과 하비 교수의 고민이 만나는 지점들이 흥미롭습니다. 어렸을 때 제가 맡았던 최루탄의 냄새와 하비 교수가 볼티모어에서 1969년에 느꼈던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점도요.


사실 이 책의 주변적인 내용에 대해서 설명하느라 정작 '시공간 압축'(time-space compression)에 대해서는 언급이 조금 적었던 것 같아요. 이 글에서는 '시공간 압축'에 대해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이제 드디어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한 대장정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부디 이번엔 진짜 할 수 있기를).


예전에 친한(?) 경제학자에게 데이비드 하비의 '시공간 압축' 개념을 소개한 적이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저는 데이비드 하비에 대해서 아는 경제학자를 거의 만나지 못한 것 같아요. 하긴, 저도 경제학자 많이 모르니까요. 어쨌든 저는 데이비드 하비가 지리학에서 유명한 마르크스 사상가라고 소개하고, "자본주의는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해법으로 시공간 압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하비의 논지를 설명했어요. 제가 잘못 설명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경제학자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건 언어를 너무 비약적으로 사용한 거 아닌가요?"라고 묻더군요. 저는 여러 가지 배경설명을 곁들여서 '시공간 압축'이 왜 지리학에서 그렇게 유명한 개념이 되었는지를 설명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설명은 대략 이랬던 것 같아요. '자본의 한계'에서 충분히 다뤘듯이, 자본주의는 과잉축적(overaccumulation)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사실 이 문장 자체가 너무 광범위해서 너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운 측면이 있어요. 자본주의라면 19세기 자본주의와 21세기 자본주의가 같은 것인지, 그리고 '과잉축적'은 필연적인지, '과잉축적'은 '이윤율 저하'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인지, 수많은 의문을 낳습니다. 이윤율 저하의 법칙에 대한 하비의 입장은 다소 모호한데 이 점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마이클 로버츠와 같은 학자는 하비가 이윤율 저하를 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이윤율 저하'가 자본주의 근본모순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비가 '과잉축적'을 위기의 원인이라고 설명하니 불편한 거죠(자세한 내용은 위 링크를 참조하세요, 한국어 버젼도 있습니다).


하비가 과잉축적(overaccumulation)을 이윤율 저하(falling rate of return)보다 선호하는 것은 '전략적 선택'일 가능성도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비는 실용주의자거든요. 생각해보세요. '이윤율 저하'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이라면, 자본주의는 이것을 극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케인즈주의와 같은 단기 처방이 안 먹힌다는 사실은 벌써 70년대에 거의 완전히 실험이 끝난 상황이었어요. 1970년대 불황이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나중에 하비 교수는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이 책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과 함께 엄청나게 많이 인용되는 책 중 하나입니다.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이 두 책에 대해서 하비 교수는 인터뷰에서 "왜 이 책들을 이렇게 열심히 인용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1968년이 케인즈 처방과 자본주의 호황의 정점이었다면, 1970년대는 우리는 모두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지배하던 시기였어요. 1972년 닉슨 대통령의 금태환 중지 선언은 전후 브레튼 우즈 체제를 종식시키면서, 사실상 이 경제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었어요. 고정환율제가 폐기되고, 변동환율제가 펼쳐지면서 이제 경제는 끊임없는 인플레이션(물가상승)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이제 믿을 건 중앙은행(미국의 연준, 한국의 한국은행) 밖에 없게 된거죠. 이자율을 조절하는 것만이 통화량과 물가상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 것이에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 등을 이유로 달러를 무자비하게 찍어냅니다. 70년대 오일쇼크로 발발한 물가상승, 그리고 스태그플레이션은 생각보다 심각한 위기였어요.


조금 다른 얘긴데, 최근 본 영화 '리브더월드 비하인드'에서 이 대사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정말 무서운 건 아무도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거야." 이와 같은 위기를 맞으면 자본주의 체계는 --그것이 이윤율 저하 때문이든, 아니면 과잉축적 때문이든, 아니면 둘 다 때문이든-- 공간적 조정(spatial fix)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합니다. 가장 쉽게 말한다면 회전율을 높이는 거죠. 회전율(turnover rate)이란, 우리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한 테이블에 몇 손님을 받을 수 있는지 하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정보통신과 교통 인프라의 투자는 회전율을 높이는데 기여합니다. 고속도로를 떠올려보세요. 우리 나라의 경제성장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경부고속도로'였잖아요. 물류의 유통이야 말로 초반부 회전율을 높임으로써 경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었죠. 한국의 경우 "일일생활권"이라는 말이 이제는 새롭지도 않습니다. 이제 계획만 잘 짠다면, 일본 정도는 당일치기 여행으로도 다녀올 수 있는 환경이 되었어요. 이것을 '시공간이 압축'되었다고 하비 교수는 드라마틱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경제학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이었어요. 인프라에 대한 투자로 인해서 물류 비용이 절감된다고 표현하면 되지, '시공간 압축'은 무엇을 지칭하느냐에 대한 문제제기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자본주의의 위기 탈출 수법이라기 보다는 그냥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 물류와 정보통신기술에 대한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케인즈가 말하는 재정정책을 통한 공황 극복과 '시공간 압축'은 어떻게 다른 거죠? 아, 정확히 이 이유로 하비가 마르크스를 케인즈 식의 '과소소비' 이론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 하비에 대한 비판 중 하나입니다(이 논문을 보세요.).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지리학이나 마르크스주의 논문에서 '공간적 조정'(spatial fix)와 '시공간 압축'(time space compression)은 진짜 공기처럼 많이 인용되는 문구거든요. 아마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누군가 논문에 시공간 압축이라는 말을 쓰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문구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경제학자'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저는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시공간 압축'이야 말로 의제 개념(fictitious concept)"가 아닌가?" 이런 생각마저 들었어요.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저와 얘기한 경제학자가 모든 경제학자의 대표도 아니며, 모든 경제학자가 '시공간 압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대화를 나눈 경제학자는 박사까지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경제학을 가르칠 정도로 경제학을 정통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시공간 압축'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충격이었던 것이죠.


이미 답은 이 글에 있습니다. 하비의 '시공간 압축' 개념은 너무 많이, 그리고 자주 인용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리고 하비 교수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의 인기에 대해서 다소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 너무 자주 인용되는 바람에 '시공간 압축'은 마치 --심지어 저에게 조차도-- 검증 받지 않아도 되는 개념인 것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에요. 이렇게 표현하면 조금 잔인할 지 모르지만, 정밀한 AI기계가 판치는 세상에서 망치와 같은 존재이지요.


망치는 집에서 못을 박을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집에나 한두개씩 있죠. 무엇보다도 망치는 액자 같은 것을 걸 때 아주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망치는 산업현장에서 대부분 더 정밀한 기계로 대체되었습니다(물론 일부 산업현장에서 어떤 부분에서는 아직도 사용되고 있겠죠). 이제는 가구를 만들 때도 망치보다는 못 박는 기계를 따로 사용하죠. 총 같이 생긴 거 있어요. 퓩퓩 소리 나면서 못 박히는 거. 어쩌면 '시공간 압축'은 망치처럼 에세이에 그럴 듯하게 써먹을 수 있는 개념일지는 몰라도, 산업현장(치열한 경제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는 유효성이 남아 있을까 하는 점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거에요. 그래도 망치가 필요한 것처럼, '시공간 압축'이 우리에게 주는 유용성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하비 교수의 이론에 대한 검증이 얼마나 이뤄졌을까요? 사실, 이것이 바로 제가 박사논문을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 박사논문은 인천공항고속도로가 '금융자본'에 의한 민간투자사업으로 건설 및 운용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협약서, 재무제표나 타당성조사 자료를 통해서 '금융자본'의 수익률을 검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습니다. 일반화하기에는 너무나 미천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저는 적어도 하비 교수의 이론을 '검증'하는 시도에 의의를 두고 싶었어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그런 점에서 아주 상징적인 책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을 통해서 '포스트모더니티'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서 좀 안다고 하비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떠들고 다니면 욕을 먹기 딱 좋을 겁니다. 포스트모더니티를 이해하고 싶으면, 푸코, 들뢰즈, 라깡, 소쉬르, 료타르, 비트겐슈타인, 무엇보다도 니체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된다면 장 보들리야르와 슬라예보 지젝도 읽어볼 필요가 있겠죠. 물론 저도 이 책들을 다 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저는 예전에 대치동에서 논술학원 강사 일을 할 때 이 철학자들의 사상을 논술지문으로 접했습니다. 저도 듣도 보도 못한 철학자들이 소개된 지문을 매주 분석하고, 공부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제 일이었죠. 그렇게 몇 년 하다 보니 엄청나게 많은 철학지문이 머리 속에 쌓이게 되고, 그로 인해서 이런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제 강의를 들어준 많은 학생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이번 글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한 시리즈는 마무리하겠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을 거의 한 것 같네요. 다음 시리즈는 다시 파리로 넘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모더니티라는 녀석이 꽃피우던 1848년 파리로 넘어가서 하비 교수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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