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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현 Jan 01. 2024

데이비스의 침식윤회설, 쿤의 과학혁명 구조, 촐리

보론: 지리학에서의 설명, 데이비드 하비, 1969

지난 글에서 잠깐 다뤘지만, '지리학에서의 설명'(Explanation in Geography)는 그냥 한번 훑고 넘어가기는 너무 아까운 책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 자체가 20세기 중반의 전후(2차대전 이후) 지리학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거든요. 이 책이 발간된 시기는 1969년이고, 이 책을 냄과 거의 동시에 하비 교수는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이직을 하게 됩니다.


이미 우리는 브리스톨에서 지리학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당시는 '계량 운동'(또는 혁명이라고도 부르는 quantatitative movement or reveolution)이 활발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피터 하게트와 브라이언 베리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생각해보니 피터 하게트와 리처드 촐리(Richard Chorley, 하비 교수가 그의 책에서 'Dick Chorley'라고 언급하는)를 언급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둘은 하비 교수의 책 서문에서 '무서운 쌍둥이'(terrible twins)라고 불리울 정도로 각별했고, 두 사람이 공저로 책과 논문도 많이 썼습니다. 1967년에는 '지리학에서의 모델(Models in Geography)"(1967)이란 책을 편집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 제목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나요?

리차드 촐리 교수


바로 이 책을 언급하면서 하비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촐리와 하게트는 지리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 과정을 '계량 운동'이라고 간주했다...(중략)... (이와 같은 노력은) 종합적인 이해를 희생한다는 단점도 있다(18)


이 이야기를 위해서 지리학자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William Morris Davis 1850~1934)와 리처드 촐리(Richard Chorley, 1927 – 2002)를 대비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가 미국 지리의 대표주자라면, 리처드 촐리는 영국에서 계량운동을 이끈 선구자(?)라고도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는 1850년에 태어나 20세기 초 왕성하게 활동했던 지리학자, 지질학자라면,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의 주요 활동시기는 1885년 자연지리학(physical geography, 구글에서 '물리 지리학'이라고 번역하지만 한국에서 '자연지리학'이라고 주로 번역합니다) 조교수(assistance professor)가 되었던 시기부터 1912년 하버드 대학에서 왕성하게 연구했던 20세기초까지가 그의 전성기라고 보여집니다(관련 자료).


그의 이론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 지리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는 '지형윤회설'(geographical cycle)입니다('침식윤회설'이라고도 합니다). 이 이론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진 않겠지만, 먼저 이 이론은 번역부터 조금 심상치 않습니다. 불교에서 까르마(karma)와 함께 제시되는 '윤회'(輪廻)라는 개념을 이렇게 번역하다니요. '침식 주기론' 정도로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지형이, 유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거치는 시간 배열을 만들어낸다는 이 주장은 예전에는 한국지리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유명한 이론이었어요. 배운 기억이 납니다.


이 이론은 간결함에 있어서 호소력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반론이 굉장히 많이 제기되었고, 지금은 굉장히 원론적인 차원에서만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하버드 매거진, 참고기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지형을 여전히 '노년기' 지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죠. 그래서 우리는 기후변화, 지진에 대해서 대비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다소 둔감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거의 과학적 확실성은 많이 부족한 이론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한국지리 시간에 분명 이 데이비스의 '지형(침식)윤회설'을 배운 기억이 있는데, 지금 고등학생들을 한국지리 시간에 이 이론을 배우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대신 우리나라가 '노년기' 지형이라는 말은 쓰는데, 이 '노년기' 지형이라는 말이 사실상 '지형윤회설'(혹은 침식윤회설)에서 왔다고 보시면 됩니다.

DAVIS, 1898E, 그림 152


나중에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또 다루겠지만, 여기에는 근대성(modernity)의 어둠이 함께 있어요. 근대 과학은 사실 어둠이 있었어요. 찰스 다윈은 진화론으로 생물학을 비롯한 전 세계의 과학 발전에도 엄청나게 기여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인종차별의 이론적 도구로 잘못 활용되기도 하였어요. 나중에 헉슬리와 스펜서라는 사람이 찰스의 진화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이상하게 변형시킨 사람으로 꼽힙니다.


윌리엄 데이비스 모리스도 그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1902년 자연지리학의 기초(Elementary Physical Geography)라는 책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Davis, 332, 1902).


(의역) 자연지리학 연구는 지구의 특징들에 대한 지식을 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하게 해준다(332). ...(중략)...역사에서 '지리적 요인'(Geographical Factors)의 영향: 역사의 발전은 지리적 요소에 의해 반복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대서양이 태평양보다 짧은 것은 행운이었다. 대체로 그 이유 때문에 신세계가 서구 유럽의 선두 인종(leading races)의 이민자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368).
(직접 번역, 원본 링크)


지금 이렇게 말하면 큰일날 소리죠. 대서양이 태평양보다 신대륙과 가까워서 다행이라니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지리학자 라쩰(Razel)이라든지, 여성지리학자인 셈플(Semple), 그리고 최근 학자로는 "총, 균, 쇠"를 쓴 제레드 다이아몬드에서 발견될 수 있는 '환경결정론' 사고입니다. 이들의 사고는 '지리'의 영향에 과몰입함으로 생겨난 환상(delusion)이라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공유된 생각일 겁니다. 한편,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는 500편 이상의 논문과 책을 쓴 직업 자연지리학자로서 그 중요성이 이런 한 두 마디에 전부 부정당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한계 덕에 '인종차별주의'와 '환경결정론' 사고를 가졌음에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나치 독일의 출현의 이론적 뒷받침을 해줍니다.

이러한 인종차별적 사고, 또한 '과학 발전'의 산물이었다는 것도 곱씹어볼만 해요. '모더니티'적인 사고가 나중에 비판철학자들에게 비판받는 것도 이런 맥락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거에요. 사실 근대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폭력성과 단절성을 안고 있거든요. 인종차별의 근거에는 과학이 항상 따라왔어요. 우리 머리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는 '골상학', 그리고 생물학자 린네에 의한 '분류학'(taxonomy)가 인종차별의 근거로 제시되었죠. 식물한테 쓰는 기법을 사람한테도 쓰기 시작한 거에요. 이와 같은 사고는 나중에 도시사회학, 혹은 도시지리학으로도 연결되는데 나중에 하비도 자주 언급하는 '로버트 파크', 그리고 우리가 부동산학, 도시지리학, 도시사회학 시간에 배우는 '동심원 이론의 버제스(Burgess), 선형이론(여기서 '선형'이 linear가 아니고, 부채꼴이라는 거 아시죠?)의 호이트라는 학자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너무 퍼져나갔는데, 제 요지는 이거에요. 과학이 처음부터 과학은 아니었어요. 과학 역시 '야만'에서 조금씩 더 과학화되어온 과정이 있었지요. 예전에 풍수지리가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진지하게 믿으면 약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잖아요. 사실 지식이라는 것이 완전한 진보에 있다고 하기 보다는 "헌 생각이 새 생각으로 대체"되는 것에 가까워요.


이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그 유명한 '토마스 쿤' 되시겠습니다. 그리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는 이 과정을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라고 간략하게 정의합니다. 각 시대의 정상과학(normal science)은 그 과학의 전제라든가 공유한 규범(norm)이 있는데, 어떤 시기에 그러한 전제와 규범이 비정상적인 것들(anomaly, 즉 기형)에 의해서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설명체계('패러다임')이 훅 바뀌면서 기존 설명이 '기형'이 되는 이변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혁명의 구조'의 주요 내용입니다. 이 사고방식은 과학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사고를 뒤집는 정말 획기적인 사고방식이었어요. 그리고 '혁명'(revolution)이라는 단어가 지식사회에서 이렇게 멋지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의 통찰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하비 역시 이 책의 전반에서 토마스 쿤의 내용을 폭넓게 인용하고 있어요.


기왕 얘기한 김에 촐리(Chorley) 이야기를 마무리해보죠. 현대 지형학은 이제 데이비스의 이론처럼 전체 지형의 순환을 한큐에 설명해낸다는 욕심을 버립니다. 대신,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 루미네선스(Luminescence dating)*, 고지자기(지질시대에 생성된 암석에 분포하고 있는 잔류자기를 통한 연대측정) 등 측정방법(dating)을 이용하여 일종의 절대 편년(absolute chronology)를 얻어내기 시작하죠. 즉, '측정'에 의한 과학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루미네선스 연대측정(Luminescence dating)은 광물입자(석영이나 장석) 내에 있는 틈새에 배경방사선의 전자(주로 칼륨 40 - 요즈음 이름으로는 포타슘 40이 되겠군요 - 이 베타붕괴를 통해 아르곤으로 변하면서 내놓는 전자 혹은 우주선에 의해 공급되는 전자)가 누적되어 있다가 태양광이나 열을 만나면 그동안 쌓아둔 전자를 방출하는 현상을 이용하여 '매몰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입니다. 광물입자에 누적된 전자의 양을 방사선 붕괴로 인하여 전자가 공급되는 비율로 나누면 얼마나 전자가 누적되는 데 걸린 시간이 나옵니다. 이것을 매몰 연대를 측정하는 방식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열이나 태양광을 받으면 광물입자가 일시에 축적된 전자를 빛의 형태로 방출(이것이 luminescence)하기 때문입니다. 열이나 빛으로부터 차단된 상태가 되면 다시 주변으로부터 비교적 일정한 속도로 전자를 공급받기 때문에 매몰된 시간에 비례하는 형태로 에너지가 축적되게 되죠. 이와 같은 성질을 이용한 연대측정법입니다.(원 사이트의 댓글 직접인용) 


그는 67년에 하게트와 함께 '지리학에서의 모델'이라는 책을 쓴 것처럼 데이비스의 침식 순환이론에 도전하기 위해서 시스템 이론과 수체모델에 근거한 정량적 모델을 동원했습니다. 촐리의 연구는 사실상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의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윌리엄 모리스 데이비스의 연구 역시 기존 과학보다는 과학적이었지만, 촐리의 연구는 '시스템', '계량', '분석'(그는 하게트와 '지리학의 네트워크 분석'(1969)라는 책도 썼습니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지리학의 계량 분석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촐리를 자연과학자라기보다는 과학철학자라고 보기도 한다고 하네요.


피터 하게트가 인문지리학의 계량의 선구주자였다면, 리차드 촐리(Chorley)는 자연지리학계에서 계량 운동을 이끌어나갔습니다. 1968년 자본주의가 정점을 찍었던 것과 거의 오마주가 되는 것처럼 1960년대는 소위 지리학에서의 '과학주의', '계량혁명', 지리학사에서는 '논리실증주의'라고 하는 운동이 정점을 이뤘던 시기였습니다.


데이비드 하비는 성급하게 '하게트와 촐리'가 성공적으로 기존 지역지리 이론을 완전히 대체했다고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량 운동이 지역 지리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종합적인 이해를 희생할 수 밖에 없는' 측면을 같이 짚고 넘어갑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20세기 학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론에 쏟아질 비난들을 알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18세기 학자들이 19세기 학자들에게, 19세기 학자들이 20세기 학자들에 의해서 대체되는 것을 보아왔거든요. 19세기 학자들은--찰스 다윈, 마르크스, 맬서스가 대표적이었을텐데-- 자신이 이뤄낸 어떤 이론이 모든 자연현상을 다 설명해낼 수 있다는 식으로 서술하곤 했어요. 그런 접근법이 위험하다는 것은 이미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실험, 그리고 1,2차 세계대전 등을 통해서 충분히 드러났어요.


하비 교수의 입장은 어느 한 쪽을 추켜 세우기 보다, "계량 운동이 지역지리와 대립하는 현상"에 대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그러한 양상이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누가 봐도 하게트와 촐리가 기존 패러다임을 대체한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시대였죠. 이러한 판도는 다시 70년대 이후에 뒤집어집니다. 데이비드 하비 본인 자신부터요.


사실 이것은 그렇게 쉽게만 다가갈 수 없는 주제이긴 합니다. 과연 진리가 있을까요? 뉴턴은 확실히 점성술보다 나은 설명을 우리에게 제공했던 걸까요?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은 정말 헛된 꿈이었을까요? 양자의 속도와 질량은 정말 동시에 측정될 수 없는 것일까요? 100년 후 우리 후손들은 어떤 과학을 '정상과학'이라고 받아들이게 될까요? 이러한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데이비드 하비는 자연과학의 철학을 지리학에 차곡차곡 대입시켜나갑니다.


이 과정은 결국 '지리학에서의 계량 운동(혹은 혁명)'의 정점을 찍습니다. 하비 교수도 그 이후로는 계량 연구를 하지 않아요. '사회정의와 도시'에서는 계량혁명이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에 성공했지만, 그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고 나중에 서술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특히 지리학에서 이러한 정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잘 아시다시피, 1970년대에는 인문지리학의 반격이 시작되거든요. 이제 현상학과 해석학의 철학으로 무장학 인문지리학(혹은 인간주의 지리학이라고 번역하는)이 '계량 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반박을 시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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