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종언'은 세계사적 흐름보다 다소 뒤늦게 한국에 당도했다. 1990년을 전후한 소련의 붕괴와 냉전 체제 종식이 서구사회에서 역사가 종언을 선고받는 계기였다면, 한국사회에선 역사적으로 처음 성취한 민주적 정권 교체(1997년)이 그 계기가 됐다. 외환위기의 우울한 기운 속에서도 전례없는 자유의 공기가 흘렀고, 세기말적 흥분이 도처에서 터져나왔다. 대결 중심의 '대문자 역사'가 약화한 자리에서 다수의 '소문자 역사'가 이야기됐다. 역설적으로 역사의 종언은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금기시됐던 역사가 발화될 수 있는 장의 시작이었고, 집단적 기억을 성찰적으로 회고하기 시작한 변곡점이 됐다.
한국영화도 그랬다. 아니, 영화계만큼 한국사회에서 근현대사를 서사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차용한 예술 장르는 드물다. 군사독재와 남북관계, 압축적 경제성장 문제 등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점의 역사가 스크린 위에 올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근현대사를 직접적으로 다룬 영화는 <꽃잎>(1996), <박하사탕>(1999), <실미도>(2003), <태극기를 휘날리며>(2004), <웰컴 투 동막골>(2005), <화려한 휴가>(2007)와 같은 영화가 있을 것이다. 시점을 과거로 옮겼지만 '대문자 역사'에서 비껴나서 역사를 바라본 영화로는 <초록물고기>(1997), <친구>(2001), <살인의 추억>(2003) 등이 있고, 시점은 과거를 다루지 않았지만 근현대사 비극을 모티프로 끌어온 영화는 <쉬리>(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 <괴물>(2006) 등이 있다.
이런 영화들을 한국사회의 집단적 역사 기억을 다룬 영화라고 칭할 수 있는데, 난 이들 영화엔 어떤 경향이 있다고 본다. '선을 넘거나, 배설(카타르시스)하거나, 미끄러지거나.' 예컨대 <공동경비구역 JSA>와 <쉬리>, <웰컴 투 동막골> 등엔 사랑, 우정을 매개로 금기시된 이념의 선을 넘는 쾌감이 있고, <실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는 그동안 마주하지 못했던 역사적 비극을 직면하고 슬픔을 전면화함으로써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친구> 등처럼 군사독재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인물들은 폭력의 질서를 내면화했지만, 그럼에도 당시를 '낭만이 있던 때'로 낭만화하며 역사를 직면하기보다는 노스탤지어(향수)로 미끄러지는 영화가 있을 것이다.
이 영화들의 경향을 크게 세 가지 맥락으로 나눴지만, 이것들을 느슨하게 묶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무게감'이다. 한국영화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포스트 히스토리(Post-History)라는 시대적 전환의 국면을 맞이하면서 과거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했지만, 그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하중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벗어나려는 한 방식으로 금지됐던 선을 넘고, 카타르시스라는 방식으로 비극을 다루고, 또는 트라우마를 외면하기 위해 과거를 낭만화하는 쪽으로 미끄러진 것이다. 역사의 종언 이후에도 트라우마는 종언되지 않는다. <살인의 추억>이 대표적인데, 영화는 연쇄살인이라는 단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은 연쇄살인이 아니라 연쇄살인을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등화관제 같은 국가적 모순이다. 미결된 연쇄살인 사건은 사실 미결된 역사적 트라우마의 변치일지도 모른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의 역사 재현의 흐름을 약사(略史)로 다룬 건 최근 한국영화에서 그 흐름이 다소 달라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역사적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보이지 않는 하중에서 한국영화가 사뭇 자유로워졌다는 인상을 받는다.
올해 개봉한 <교섭>(2022)은 그런 측면에서 흥미로운 기획의 영화다. 영화가 다룬 샘물교회 선교단의 아프가니스탄 피랍은 굉장히 논쟁적인 사건이다. 한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을 여행제한국가로 분류한 상황에서 샘물교회 교인들이 선교를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해 피랍된 사건으로, 2007년 사건 발생 당시 국내외적으로 개신교를 향한 비난이 폭발했었다. 사건 해결 과정에서 정부가 대테러 단체와 직접 접촉하며 국가 이미지가 실추됐고, 정부 외교력이 소모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16년밖에 경과하지 않은 사건이어서 여전히 많은 대중이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나온 것이다.
<교섭>은 논쟁적인 부분을 의도적으로 한쪽으로 제쳐두고, 외교부와 국가정보원 공무원의 활약상을 주로 다룬다. 임순례 감독도 영화 제작 당시 인터뷰에서 "극단적 기독교와 극단적 무슬림, 두 극단의 종교적 신념이 부딪히는 센서티브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외교부 직원과 국정원 직원처럼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에게 포커스를 맞춰서 풀어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영화에서 논쟁을 부른 역사적인 구체는 부차적인 문제로 강등되고, 그 자리를 두 인물의 영웅 서사가 대체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한국영화계는 이제 영화로 다룰 만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라면 역사적 논쟁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크린으로 길어올릴 수 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관객의 집단적 기억과 영화 속 역사적 사실이 조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들의 평을 봐도 <교섭>을 황정민과 현빈이라는 빼어난 두 톱 배우 중심으로 짜여진 하나의 "정공법으로 잘빠진 상업영화"로 관객들은 받아들이고 있다. <교섭>은 침체한 극장가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170만 관객을 모았다. 실재와의 존재론적 결속을 잃어가는 디지털 영상 시대의 관객의 특징일까. 한국영화에서 역사적 기억은 부차적인 자리로 밀려나고, 그 자리를 역사라는 소재의 영화적 쾌감이 대신하고 있는 것 아닐까.
<밀수>(2021)도 마찬가지다. 1970년대 해녀들의 밀수 사건을 가져오긴 했지만, 영화는 1970년대와 무관하다. 류승완 감독은 <군함도>(2017)에서 비롯된 영화 안팎의 논쟁을 겪은 후, 오락영화의 쾌감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다. 전작 <모가디슈>(2021)도 남북 화해를 끼워넣긴 했지만, 정작 류 감독이 집중하는 건 모가디슈를 탈출하기 위한 자동차 추격전(카체이싱) 씬의 한국적 연출이었다.
<밀수>에서는 더 노골적이다. 1970년대 밀수가 횡행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국가 주도 경제라는 배경은 단 한 장도 끼어들 틈이 없다. 류 감독이 대신 공들인 건 해녀들의 수중 액션, 조인성의 육탄전이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은 하나의 매력적인 분위기로만 차용될 뿐 서사에서 의미있게 작용하지 않으며, 해녀 밀수 사건은 여성 승리 서사라는 결론을 만들기 위한 도구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밀수>가 1970년대에서 가져온 건 시대가 아니라 스펙터클(구경거리)의 가능성이다.
한국사회가 근현대사에 가진 가장 큰 트라우마를 꼽는다면 전두환이라는 인물과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사건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이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는 영화 속 구도를 전두환이라는 가해자와 시민 또는 민중이라는 피해자로 나누고, 여기에서 공분과 집단적 죄의식을 끌어낸다. 그러면서 비극의 카타르시스 또는 대리 해결을 통한 위로의 방식으로 영화를 끝맺었다. <화려한 휴가>가 전자의 방식이라면 <26년>(2012), <택시 운전사>(2017)는 후자의 방식이었다. 이들 영화에는 5·18 민주화운동에서 비롯된 역사적 하중이 육중하게 작용했고, 그 무게감에서 벗어나는 나름의 방식이 각자 영화의 결론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서울의 봄>(2023)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전두환 또는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에 비해 도드라진다. 우선 영화 속 구도는 기존 영화들처럼 가해/피해가 아니라 승/패다. 12·12 사태의 종국적 피해자였던 시민·민중은 영화 마지막 클라이막스에서 주변부 구경꾼 자리로 밀려나 있다. 대신 전두환을 모델로 한 전두광의 공성(攻城)과, 장태완을 모델로 한 이태신의 수성(守城)이 영화의 핵심 구도다. 적어도 하나회 실제 사진이 등장하는 영화 마지막에 도달하기 전까지 영화는 역사적 무게감을 소환하지 않는다. 12·12 사태를 앞두고 벌어진 9시간의 공성전에만 집중한다.
그 방식은 전두광이 검은 바둑알을 집어들며 "이 한 수로 요 판세를 싹 뒤집어뿟다"고 말하는 장면처럼 마치 바둑 대결처럼 전개된다. 전두광은 하나회를, 이태신은 비(非)하나회를 포섭하며 포석(布石)을 깐다. 아군을 동원하며 행마(行馬)를 통해 대마(大馬)를 키워 승부수(勝負手)를 노린다. 국방부 장관이 놓은 단 한 수의 패착(敗着)은 국면(局面)을 뒤집고 결국 승부는 결정난다. 바둑 용어를 동원한 건 바둑의 한 수 한 수처럼 양측이 번갈아가며 공세하며 그 동력으로 영화의 서사가 끌어당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팽팽한 긴장감엔 역사적 평가가 배제돼 있고, 역사적 죄의식에서 비롯된 어떤 신파도 파고들 틈이 없다. 단지 스펙터클한 대결로 그려질 뿐이다.
전두광이란 캐릭터도 특별하다. 한국사회에서 역사적 죄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전두환은 영화 속에서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다뤄진 적이, 적어도 내 기억엔 없다. 대중의 집단적 기억이 용납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김성수 감독은 전두광을 영화 속 '투 톱' 중 하나로 내세운다. 이태신은 정의로울지언정, 매력적인 쪽은 전두광이다. 오합지졸 '똥별'들을 몇 마디 말로 제압해 제 편으로 만들고, 불리한 전세를 묘수(妙手) 하나로 뒤집는다. 이태신은 전력을 다하지만 결국 유리한 판세를 만드는 건 전두광이다. 마치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2018)에서 타노스와 어벤저스의 대결처럼 전두광은 압도적이다.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은 역사적 죄인이 아니라 매력적인 빌런으로 작동하며, 관객을 끓게 만드는 건 죄의식이나 공분이 아니라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다.
그런 면에서 1000만 관객 동원을 앞둔 <서울의 봄> 흥행세를 만든 건 역사적이고도 집단적인 트라우마가 아니다. 트라우마는 피해에서 비롯되는데, 영화 속에 패배자는 있지만 피해자는 없다. 영화엔 역사적 비극의 참담함 대신 승부의 긴박감과 승패의 아찔함이 가득할 뿐이다. 이건 김 감독이 12·12 사태의 9시간을 역사적 평가를 위해 스크린이라는 도마 위에 올린 게 아니라, 스펙터클의 한 소재로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종언 이후, 즉 포스트 히스토리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유희의 공간과 공적 매혹을 생산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국영화는 역사적 무게의 굴레를 여전히 살짝 걸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근현대사에 대한 한국영화의 감각이 갱신되고 있으며, 올해 몇 편의 영화에서 그 증거가 비쳤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