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만큼 오랫동안 오해받은 고전소설도 드물 것이다. 괴물을 창조한 인물의 이름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으로 잘못 불린 만큼이나, 이 소설의 주제는 곡해돼왔다. 과학 발전이 세계를 구원하리라는 인간의 오만과 그렇게 달성된 과학 기술의 위험함 등이 소설의 주제로 자주 이야기된다. 하지만 정작 소설 자체는 그런 주제와 별 관련이 없다. 소설은 호기심 가득한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피조물을 창조하지만 뒤늦게 후회하며 그것을 혐오하고, 피조물은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 세상을 배워나가지만 자신을 향한 혐오에 고통받다가 괴물이 되어버리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피조물의 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험담이며, 그 과정에서 배움을 거듭하는 성장소설이고, 그러나 결국 홀로 떠나야했던 어떤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괴물이 되어버린 피조물이 떠난 이후를 모른다. 다만 우리는 피조물이 함께 할 여자 피조물을 원했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괴물이 돼 떠났다는 건 안다. 만약 피조물이 어디선가 여자 피조물을 직접 창조한다면?
<가여운 것들>은 이 가설에서 시작한다. 갓윈 벡스터(윌렘 대포)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처럼 보인다. 얼굴은 얼기설기 살점을 엮은 것처럼 같고, 신체는 여느 인간의 것과 달리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위액을 만들어내는 장치를 달고 식사를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실험 대상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러나 이제 그는 피조물이 아니다. 갓(God·신)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은 『실낙원』을 읽으며 신과 피조물의 관계를 학습했다. “아담처럼 저는 그 어떤 존재와도 연결고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위는 모든 면에서 저와 달랐습니다. 아담은 하느님이 직접 빚은 완벽한 피조물이자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행복과 번영을 누릴 존재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었고, 하느님이나 천사들처럼 더 고귀한 존재들로부터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망가진 존재였고, 무력했으며, 오롯이 혼자였습니다.” 거기서 얻은 깨달음일까. 피조물은 위치를 바꾼다.
혼자였던 피조물은 스스로 하느님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 피조물을 만드는 창조주가 된다. 대신 자신의 창조주가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은 이름이 없었다. 외모는 흉측했다. 무명(無名)은 고독의 뿌리였고, 추함은 대중들의 혐오의 이유였다. 고드윈은 자신의 피조물에 ‘벨라’(엠마 스톤)라는 ‘아름답다’는 뜻의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더해 세상과 아직 부닥치지 않았던 아이의 뇌를 심는다.
그로테스크한 이런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벨라의 몸은 빅토리아라는 자살한 여성의 몸이고, 벨라의 뇌는 빅토리아가 임신하고 있던 아이의 뇌다. “개선, 전진, 진보, 성장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목표”라는 벨라의 영화 속 대사는 그 자신의 몸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현 세대의 몸을 갖고 있지만 후대의 정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벨라며, 그런 신체와 정신의 세대적 이격이 <가여운 것들>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정체한 구태를 드러나게 하는 장치로 활용된다. 벨라의 약혼자 맥스 맥캔들리스(라미 유세프)는 벨라가 사용하는 어휘가 상류사회의 어법에 맞지 않는다 지적하고,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은 벨라가 입을 열 때마다 안절부절 못하며, 여행 중 만난 이들은 벨라의 예법을 지적한다. 벨라는 그런 엄숙함을 짐짓 왜 이렇게 난리냐는 식으로 조소하고, 이런 상황은 블랙유머로 쓴 웃음을 짓게도 하지만 종국엔 빅토리아 시대의 위선이 드러낸다.
<가여운 것들>의 서사 전략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럴 테지만, 이런 설명이 이 영화의 매력을 충분히 드러내진 못할 것이다. 정작 이 영화가 관객을 매혹하는 것은 이미지다. 갓윈 때문에 집에 갇혀 있던 벨라가 던컨을 따라 리스본으로 떠났을 때 처음 만나는 총천연색 하늘, 광각렌즈와 어안렌즈로 왜곡된 공간과 같은 기묘하며 아름다운 이미지들 말이다.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하는 이런 장면들은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스타일의 특징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을까. 난 꼭 그렇게만은 보지 않는다. 이런 스타일의 특징은 벨라 모험의 성격을 상징적이면서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벨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고정된 관념을 ‘인식’함으로써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신체를 통과한 ‘지각’(知覺)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영화가 담아내는 이미지가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듯이. 말하자면 벨라의 모험은 ‘몸의 현상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몸’은 벨라 모험의 시작이다. 벨라는 자위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자각하고, 궁극적으로는 감각의 기원이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분노할 때도 “화가 난다”고 말하지 않는다. “분노가 몸에서 나오고 있다”고 말한다. 벨라에게 감각은 몸에서 실증적으로 확인 가능한 어떤 것이다. 던컨이 사랑을 말할 때도 벨라는 실증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몸을 자각하는 데서 그치진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몸으로 부딪히며 확인해나간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빈민의 모습을 보고 계급 문제를 알게 되고, 상류 계급을 만나서는 다른 계급과 구별짓기를 위한 언어를 배우며, 배에서 흑인 승선객을 통해서는 인간의 사악함을 고민한다. 그 다음은 세계 속에서 자신이란 존재의 위치. 벨라는 파리 매음굴에서 그곳 여성들이 남성의 선택을 받아야하는 주체성이 상실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그 상황을 합리적인 이유로 전복하려하지만 실패한다. 요컨대 벨라의 모험은 자신을 자각하고, 세계를 배우고, 세계 속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순으로 전개된다.
이런 모험의 전개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과도 유사하지만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벨라는 결국 전복에 성공한다.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은 그 당대에서 해법을 찾지 못하고 결국 소설의 종반에서 얼음 속으로 도망을 친다. 그러나 벨라는 다르다. 빅토리아 시대는 정복 전쟁이 곳곳에서 벌어지던 때였다. 남성은 전쟁터로 나갔고, 여성은 집안에 남았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 분리가 명확해지던 때가 그 시기다. 전쟁 경험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벨라(몸)의 전 남편은 순종적 성역할을 벨라에게 강요한다. 나아가 벨라의 음핵을 제거함으로써 벨라의 모험의 시작을 무효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벨라는 전 남편에게 마취제를 탄 술을 뿌리며 이를 거부한다. 바깥 세상을 구경하려다 갓윈의 마취 손수건에 쓰러졌던 벨라는 약혼자 맥스의 코를 마취 손수건으로 막으며 모험에 떠나고, 종국엔 마취제를 탄 술을 뿌려 성 역할과 위계를 전복한다.
그럼으로써 빅토리아가 강에 몸을 던지며 수직적 구도로 시작했던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수평적 구도를 갖는다. 전 남편은 염소의 뇌를 이식받고 염소가 됐고, 매음굴의 흑인 동료 여성은 벨라의 곁에 앉는다. 개와 닭을 혼종한 ‘개닭’도 평화롭게 꽃밭을 노닌다. 각자가 각자의 빛깔로 빛나는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떠났던 벨라는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처럼 쫓겨나지도, 도망치지도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탈주지만, 최종적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모험이며 여행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가여운 것들>의 서사가 전복한 건 오랫동안 우리 기억에 남았던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의 가여운 실패담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