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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무리 May 07. 2016

고백(go back), 전진(go forward)?

청년, 희망이라는 육지없이 고통만 존재하는 건 좀 너무하다

                                                                                                                                                                                                                                                                                                                                                                                                                                                                           

 DC 인사이드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를 파는 사이트였다. 초창기에는 말이다. 그러다 이런 저런 갤러리를 만들어 카테고리를 운영하게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온라인 커뮤니티의 역사가 태동하게 된다.


 아주 맨 처음 사이트의 형태는 기억하지 못한다. 나도 중간에 유입된 '뉴비'이며 '눈팅족'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그 '갤러리'라는 게시판에는 창의력이 늘 홍수처럼 넘쳐났다. 우리끼리는 이 넘치는 창의력을 '잉여력'이라고 불렀다.


 그 잉여력에는 게시글과 제목의 센스, 혹은 필수요소(게시판의 화두를 지칭) 이미지 합성, 'DC문학'이라고까지 불렸던 병맛 게시글, 아니면 초기 웹툰들(그 당시 잉여들의 모습을 잘 반영한)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지구를 정복할 수도 있을 것같은 자신감이 샘솟기도 했다. 눈팅족인 나도 그랬는데 아이디를 만들어 '네임드'까진 아니어도 여러므로 활동하던 그 잉여들의 공동체 의식은 오죽했을까?


 그들은 때로 본인들의 잉여력(때로는 한심함을 의미함)을 과시하며 자신이 얼마나 이를 안닦았는지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고 갤러리에서 코드가 되는 컨텐츠를 2차 3차로 가공하여 플래시 게임, 만화 등으로 승화시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현실에서 만나는 것을 'X목질 극혐' 이라 칭하며 극도로 꺼려했다. 아마도 익명성 유지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곳은 나에게 축소된 사회였고 이 글로 담지 못할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20대 초반이나 사회 초년생이 다수였고, 그외 20대, 30대 순으로 인원이 구성되었고 심지어 40대도 조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10대였고 그들의 헛소리와 지금은 병맛이라고 불리는 조잡스러움에 열광했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정신을 계승한 셈이다. 그곳엔 나처럼 적지않은 10대들이 그 주위를 맴돌았을 것이며 갤러리 사람들의 자조적, 냉소적 태도나 때론 유쾌하면서도 절망 끝에 좌절 하는 모습 또한 상속 받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 속에서 요즘 젊은 것들은 '노오력'을 안하는 것처럼 내비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빨리 그런 태도를 습득했기에 생기는 새로운 현상이겠거니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또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노력을 해야겠다는 일념하에 고등학교 3년 내내 야자를 하고 재수 1년 학원에서 매일 14시간씩 살며 입시를 준비했다. 그렇게 난 내가 원하지 않았던 학교에 도착했고 졸업 후 갈 곳 없을 나의 처지를 비관 혹은 방관하고 있다. 문득 돌이켜 보니 자조적인 그때로 , 혹은 그때 그들이 지키고 있던 자리로 되돌아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주중에는 학교를 다니고 주말엔 알바를 한다. 이틀 동안 28시간 일하며 장애인 활동보조를 한다. 매주 20, 한달에 80인데 여기서 세금이나 사대보험을 제하면 70남짓, 교통비에 휴대폰비로 20만 원은 본 적 없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밥값으로만 한달에 최소 30만원 씩 나간다. 남들 먹는 거에 간식 좀 먹었다 싶으면 남는 건 주머니 속 먼지뿐, 모이는 것이 없으니 일하는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모으자니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내 친구들이 나와 놀지 못하는 고통과 나의 절약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나도 크다.


 그렇다고 개인방송을 켜고 내가 인간이라는 마지막 존엄까지 버리면서 인기를 얻기는 싫다. 하지만 여전히 내 장래는 불분명하다. 누구는 불분명하다는 것이 희망이라고 설파하며 책을 내어 떼돈을 벌어가고 누구는 xx쨔응을 우상숭배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차라리 X덕들처럼 뭐라도 미친듯이 좋아하는 게  부러운 적도 있었다. 아무리 고통의 바다라지만 희망이라는 육지없이 고통만 존재하는 건 좀 너무하다. 잉여나 오덕들의 성공사례도 소수일 뿐 나는 여전히 주변을 맴돈다. 그림쟁이를 꿈꿨던 나는 좌절한 이후 공책에 낙서하며 희미한 불빛을 종이에 묵묵히 옮겨 볼 뿐이다.


                                                                                                                         by 박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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