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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Jan 17. 2024

여행의 이유를 더듬다

  항상 똑같은 일상과 익숙해진 감정들 그리고 사람들. 무뎌져 버린 작고 작은 나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쯤 떠나야겠다는 찰나의 순간이 왔다. 심장과 명치 사이에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솟구쳤다. 3년 만에 인천공항에 왔다. 스물 다섯 처음 배낭을 메고 비행기를 탔을 때와는 달리 서른인 지금은 겁이 조금 많아졌다.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고 세상을 향한 호기심보다는 세상의 위험함이 커보인다. 그때의 용감함은 어디로 갔을까. 한 발만 내딪으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머릿 속은 득과 실로 가득 차 있다.


  이번에 선택한 여행지는 대만이다. 따뜻한 나라 가고 싶었지만 관광 휴양지는 싫었다. 썩 가고 싶었던 여행지는 아니었는데 사실 어디로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있고 싶었다. 한자 문화권으로 혼자 여행을 간 것은 처음이다. 대만 사람과 나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한자는 알파벳보다 더 낯설었다. 많은 글씨가 궁서체로 무섭게 쓰여져 있는 것도 한 몫 했다. 두려움은 현지인과 교류하면서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서서히 잦아들었다.


  급하게 준비한 여행이라 여권 만료일이 6개월 보다 적게 남겨진 걸 모르고 비행기를 예약해 버렸다. 구청에서 급하게 긴급 여권을 발급받아 대만에 도착했는데 출입국 심사대에서 거절을 당해 버렸다. 심사관은 왼쪽100m 앞에 있는 장소로 가라고 했다. 그는 연신 “you need a visa”만 말했다. 갑자기 비자라니. 공항에서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나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빨간색 안내 표지판을 따라갔다. 머지 않아 궁서체로 쓰인 비자 발급소가 보였다. 혹시나 여기서 빠꾸 당하면 어떻게 하지.


  당황해 하는 표정을 본 직원 한 명이 유리벽 넘어 바로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휴대폰으로 비자 발급 페이지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다급해 보이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직원은 한 페이지씩 같이 읽으며 작성을 도와주었다. 유창한 영어로 ­”너 범죄 사실이 있니” 라며 글을 요약해 주기도 했다. 아주 바른 인생을 살아온 나는 빠르게 비자 발급을 끝낼 수 있었고 직원에게 정말 감사하다며 “Thank you very much”를 날렸다. 그리고 그녀의 아주 밝은 웃음을 봤다. 순간 여행을 잘 왔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7페이지 서류 작성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걱정은 긴장감이 넘치는 출입국 심사에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과 예약해 놓은 호텔과 기차 스케줄을 날려 버리면 어떻게 해야지 대한 것이었다. 공항 직원의 다정함 덕분에 여행의 시작점에서 나도 다시 순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거리감이 좋았다. 거주자가 아닌 여행자가 되면 주변에 하나의 선이 그려진다. 나와 상대는 그 선을 조심스럽게 좁혀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거리감은 너와 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서로는 함부로 선을 넘지 못한다. 상대를 생각하는 조심스러운 다정함이 좋았다. 새로움을 바라보는 두 영혼의 교집합인 구역에서 익숙함이 만들어 낸 염증은 이렇게 치료된다.

안전하게 입국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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