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족이나 친구가 자살의 위험에 처해 있다면
자살공화국
자살과 관련된 새로운 통계가 발표될 때마다 기사들이 앞다투어 우리나라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지난 20년 동안 OECED 국가 중에서 자살률에 있어서 1-2위를 다투어 왔다. 이렇게 자살로 죽음을 맞는 사람의 수가 하루에 약 37명에 이른다. 2010년을 전후로 인구 10만명 당 약 31명까지 치솟았던 자살률은 지난 약 10년 간 추세선이 감소하는 양상을 나타내서, 2020년을 기준으로 25명대까지 감소하였다. 그럼에도 자살은 여전히 선진국이 된 우리나라의 아픈 손가락이다. 통계청의 사망원인통계에 의하면 자살은 우리나라에서 10대 사망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데, 암, 심장 질환, 폐렴, 뇌혈관 질환의 뒤를 이어 무려 사망원인 5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0대-30대 연령대에서 자살은 압도적으로 사망원인 1위에 해당한다.
이런 통계를 뒷받침하듯이 주변에서 종종 자살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보는 경우들이 생길 수 있다. 자살의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언어로, 행동으로 그들의 고통과 그 고통으로 인해 죽고 싶은 심경을 계속 토로한다. 어떤 사람들은 언어적으로 직접 표현을 한다. "죽고 싶어" "그만 살고 싶어" "다 끝내버리는게 낫겠어" "나만 없어지면 다 괜찮아질텐데" 등. 어떤 사람들은 갑작스런 행동의 변화를 나타내기도 한다. 중요하게 여겨오던 일들을 갑자기 내팽개치거나, 자살을 암시하는 일기 또는 SNS 글을 작성하거나,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거나, 그러다 결국은 자살계획을 세우고 자살시도를 하기까지.
그런데 막상 나의 가족이, 또는 나와 정말 가까운 사람이 이런 자살의 위험 징후를 보이면 어떨까.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가 자살에 대한 위험을 보일 때 우리는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우리가 아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하기도 하지만, 설득이나 충고를 하기도 하고, 때론 심지어 화를 내거나 그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물론 우리의 대응이 언제나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설령 좋은 의도로 건넨 위로나 조언마저도. 그래서 자살을 얘기하는, 또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6가지로 정리해 봤다.
1. 조언 또는 해결책 제시하기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반응 중 하나다. 일종의 교정반사다. 교정반사란 쉽게 말해 상대방의 문제를 교정, 즉 고쳐주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되는 말과 행동들이다. 굳이 자살하려는 생각이 없는 일반적인 사람들도 교정반사에는 저항을 보인다. 외부에서 고쳐주려는 노력이 강해질수록 더욱 더 변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자살위험이 있는 사람. 조언과 해결채에 대한 이들의 심리적 저항은 더욱 강할 수 있다.
자살하고 싶다는 마음은, 죽음만이 현재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겨질만큼 꼼짝없이 문제 안에 갇혔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미 자신을 자살로 몰아갈만큼 힘겨운, 암만 노력해도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에 맞닥뜨려 있는 것이다. 그게 도무지 해결할 수 있는 경제적인 문제이든,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든, 바꿀 수 없는 신체적 질병과 고통 때문이든.
이런 상황에서 외부의 충고와 조언이 설령 옳은 말이라고 해도 그걸 몰랐을 리도 없고, 새롭게 알았다고 한들 이들의 생각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는, 병원에 가보라거나 심리상담을 받아야겠다는 얘기조차도 그가 처한 고통을 '경청'하지 않은 채로 이뤄진다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더군다나 자살자의 다수가 심각한 우울증을 동반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지적 기능이 저하되어 올바른 생각이나 판단을 하기 어려운 경우들도 많다. 자칫 문제가 없어 보이는 '합리적인 충고와 조언'이 독이 될 수 있는 이유다.
2. 가정하기
당신이 '죽고 싶다'는 사람과 '죽고 싶다'는 생각에 대해 얘기할 일이 있다면, 그건 이미 그 사람으로부터 어떤 위험한 신호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아 힘들어 죽겠어' 정도의 뉘앙스가 아닌 이상에야, "죽고 싶어", "찻길에 뛰어들고 싶어", 이런 말을 한다면 이미 우리도 상대방이 어떤 큰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는 셈이다.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아래와 같이 자살하지 않을 거라는 나의 가정을 얘기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죽고 싶다고 진짜 죽으려는 건 아니잖아, 그치?"
"그래, 그래도 진짜 죽을 생각하는거 아닌건 알아. 그래도 힘든 건 맞지."
물론 이런 가정에는 상대방이 자살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과 소망이 깃들어 있다. 그런 소망과 바람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럼에도 그런 바람이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면 자살을 생각하는 상대방은 죽도록 힘든 자신의 고통에 대해 전혀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고, 괜한 반발심을 불러일으켜 더 위험행동으로 내몰게 될 수도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
3. 당사자의 고통을 평가절하하기
때로는 자살사고르 가진 사람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실제로 자살로 생을 마치신 유명인 또는 연예인들의 삶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일반인들이 그 분들의 삶의 겉면만을 스쳐 봤을 때는 부와 명예, 그리고 인기 등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많은 것들을 가졌는데 그 모든 걸 내려놓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만큼 힘든 일이 있을까, 생각이 들수도 있다. 또는 자살하고 싶다는 사람에 대해 '힘든 건 알겠는데 그게 진짜 자살할 정도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될수도 있다.
"힘든 건 알겠는데, 솔직히 자살할 정도는 아니잖아. 정신 차려."
"너 정도면 다 갖췄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그래. 세상에 더 힘든 사람 많아."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그런 이야기를 입으로 꺼내 들려주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 무효화 (invalidating) 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즉 '죽고싶을만큼 힘들다'고 표현된 정서적 경험에 대해 거절하거나, 부정하거나,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으로 상대의 고통을 평가절하하지 않아야 한다. 자살을 생각하는 그 사람이 지각하고 있는 그 고통은 실제이며 그 사람이 당면한 현실임을 반드시 인정해야만, 비로소 거기서부터 대화를 시작해 나갈 수 있다.
4. 다그치거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기
"죽는다니 뭐 어쩌느니 그런 바보같은 생각 하지마. 알았어?"
"남은 가족들은 어쩌려고 그러는거야. 그런 멍청한 생각은 입에 담지도 마."
"야, 죽을 용기로 살아가면 못할 것도 없겠다. 바보같이 굴지 마."
"지금 이렇게 너 혼자 죽어버리면, 그거 진짜 이기적인거야. 남은 사람 생각해야지. 진짜 그러려는거 아니지?"
자살을 생각하는 상대방을 비하하거나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반응들이다. 하지만 수치심은 우울증이나 자살하고자 하는 생각을 악화시킬 뿐이다. 그들을 더욱 궁지에 몰게 될수 있는 말들이기도 하다. 일시적으로는 동의하거나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살을 막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가족, 남겨질 자녀 또는 애완동물 등 살아가야 할 이유들을 찾는 건 자살예방에 도움이 되지만, 이런 식의 다그치고 비난하며 수치심을 주는 언행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5. 가볍게 생각하거나 낙관적으로 대응하기
자살하고 싶은 마음을 타인에게 말한다는 건 많은 경우에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도움을 요청하는 말일 수 있다. 저번에도 비슷한 말을 했다가 별 탈 없이 넘어갔다고 해서 이번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자살의 위험에 확률을 매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자살을 막고자 한다면, 그 위험이 1%이든 10%이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막아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죽고 싶다"와 "죽어버릴거야" 사이에는 그 행간에 차이가 있다. 간혹 어떤 이들은 자살을 빌미로 상대를 위협하거나 조종하려 드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통제권을 쥐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하지 않으면 나 죽어버릴거야"라고 말하는 경우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우리는 죽음의 단어에 무뎌지고 또 익숙해지고 만다. 마치 양치기 소년과 늑대의 우화처럼. 그럼에도, 그 결과가 돌이킬 수 없는 너무나 치명적인 것이라면,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아주 섬세하고 엄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다 괜찮아질거야" 또는 "내가 다 해결해줄테니깐 걱정마" 와 같이 낙관적인 말로 대응하거나 지킬 수 없는 공수표를 날리는 것도 피해야 한다. 의도와 상관없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나 확언은 피해야 한다.
6. 혼자 내버려두기
이미 언어적, 행동적, 정서적, 상황적인 단서들을 통해 여러 자살 위험 징후를 나타냈다면, 혼자 있도록 내버려둬선 안된다. 집단자살 또는 동반자살과 같은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자살은 매우 개인적인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대부분의 경우 혼자 있을 때 일어난다.
급성우울증으로 인한 경우 자살의 징후가 나타난다면 위급한 상황일 수 있으므로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할 수도 있다. 입원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절대 혼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자살 위험에 처한 사람의 곁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 입원이 가능해지거나 자살 위험이 상당 수준 낮아질 때까지 말이다.
자살은 문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다.
(Suicide is not the problem, it is the solution to a problem.)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자살예방교육 또는 위기상담 수업을 할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꼭 언급하는 이야기다. 말 그대로, 대다수의 경우에는 자살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다른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라는 뜻이다. 물론 자살자들도 자살이 본질적인 문제해결이 아님을 알고 있다. "죽고 싶다"는 말은 결국 "죽을만큼 힘들다" 는 말로 이해되기도 한다. 결국 자살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도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그 선택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고,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다른 수가 없어서 자살에 이르게 된다. 그럼에도 자살은 한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최후의 탈출구인 셈이다.
회복탄력성이란 고난과 역경 가운데에서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힘과 자원을 말한다. 이 회복탄력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많은 연구들은 회복탄력성을 이끌어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복잡한 것이 아니라 역경 가운데 있는 사람을 정말 진심으로 케어해주고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게 가족이든 설령 가족이 아니든, 단 한사람만 있어도 우리는 일어설 힘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세심한 관심과 경청, 공감,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가 한 사람을 죽음의 수렁텅이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