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문의 '크래프톤 웨이'를 읽고
종종 기사 쓰기 강의를 한다. 음식 만들기(와 먹기)를 즐기는 나는 기사 쓰기를 곧잘 요리에 비유한다. 요리는 장보기부터 시작된다. 좋은 재료 확보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재료가 좋으면 훌륭한 요리가 완성될 가능성이 크다. 투뿔 한우에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를 바르고 히말라야 핑크 솔트를 솔솔 뿌려 숙성했다가, 잘 코팅된 팬을 달궈 지지직 굽고, 프레지덩 버터를 끼얹어 레스팅 시켜 먹는다고 생각해 보라. 군침이 절로 돌지 않는가. 그 기름진 팬에 다시 싱싱한 완도산 전복 두미를 구워서 곁들인다면…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하지만 재료가 좋다고 무조건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요리사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산해진미로 꿀꿀이죽을 쑤고 말 수도 있다.
‘크래프톤 웨이’는 재료가 좋은 이야기다. 글로벌 흥행을 거둔 대작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창조한 스타트업 10년사. 그 포문을 열어젖힌 장병규 의장의 열정과 비전, 경영 철학이 주재료이며 회사의 경영진, 거물 제작자들이 뜨고 지고 충돌하는 모습이 주재료 못지않은 부재료다. 블루홀에서 크래프톤에 이르기까지 이 회사를 거쳐간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는 결코 빠져서는 안 될 양념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소금, 후추 없는 스테이크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기왕이면 겨자씨 소스도 있어야 한다. ) 저자 이기문 기자가 서문에서 이 책을 두고 “결국엔 사람 이야기” 즉, “게임계에서 행성처럼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인간들이 서로 만나 부딪히며 벌어진 이야기”라고 규정한 이유다.
덕분에 배그는커녕 게임에 전혀 일가견이 없던 나조차 배그 스트리밍을 찾아보거나 직접 플레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중간중간 당장 캐주얼 게임이라도 다운받아 해보고 싶다는 충동도 일었다. 무엇보다 게임업계에 흥미가 생겼다. 내게는 깜깜하기만 했던 세계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태우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구나… 솔직히 놀랐다. 이들을 ‘지식 산업 인재’로 칭하며 태도와 의무에 대해 설파한 ‘장병규의 메시지’에서는 책 한 귀퉁이를 고이 접어 둘 수밖에 없었다. 두고두고 읽어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지식 산업에 종사하는 나는 과연 인재였던가’ 뜬금없이 성찰도 해봤다. 무엇보다 고객의 평가를 최우선시하고 어떻게 하면 전 세계 잠재적 고객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임 콘텐츠 서비스 회사’ 블루홀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 회사를 비롯해) 기사라는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언론사, 그리고 기자들의 고민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돌아봤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탄스러운 것은 이토록 다양하고 방대한 재료를 깔끔히 다듬고 자르고 지지고 볶아, 나 같은 ‘게임 알못’도 맛깔나게 읽도록 엮어낸 이기문 기자의 스토리텔링 능력이다. 그는 블루홀을 중심으로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한 여러 인물의 삶의 궤적, 대화, 회의록, 이메일 중 적절한 내용을 발췌, 인용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자신만의 해석을 보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하루, 이틀 취재한 기사도 쓰기가 어려운데 취재와 집필에 2년이 걸렸다고 하니, 놀랍다. 이 정도로 규모의 프로젝트를 집필해 본 기자는 국내에서 손에 꼽을 것이다. 솔직히 부럽다.
재미는 사람마다 다르게 분포하는 것이다. 게임의 흥행이란 저마다 품고 있는 재미의 파편 속에서공통의 재미 감각을 엮어 올리는 예술이었다.
이미 이 책을 읽었거나 읽고 싶은 이들의 동기는 다양할 것이다. 아무래도 게임업계 종사자, 개발자, 스타트업 경영자가 많을 것 같기는 하다. 혹은 배그 팬이거나. (친구 집 책장에 이 책이 꽂혀있었는데, 우연히 놀러 온 배그 팬 초등학생 어린이가 표지를 보자마자 읽고 싶어 했다고…) 하지만 나 같은 #문과 출신 #게임 알못 #10년 차 직장인, 혹은 #콘텐츠 기획 제작자 등 그 누구라도 책에서 많은 “영감과 직관”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그랬듯 말이다. 일독을 권한다.
크래프톤 역사를 담은 이 책은, 결국엔 사람 이야기다. 게임계에서 행성처럼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인간들이 서로 만나 부딪히며 벌어진 이야기다. 별처럼 빛을 내는 데 성공한 사람도, 유성처럼 추락하며 어두워진 사람도 있다. 대개는 실패했고 소수만 성공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스스로를 태우며 끊임없이 움직였다..
많은 독자에게 재밌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재미 속에서 저마다 의미를 발견했으면 한다. 그 의미로 더 높은, 혹은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점화했으면 좋겠다. 이 책이 자기 연소의 불쏘시개가 된다면 저자로서 더 바랄 게 없다.
- 책 서문 중 저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