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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진 Oct 29. 2023

무용함의 시간

곽아람 '공부의 위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은 류시화 시인의 베스트셀러 시집이다. 학창 시절 집에 굴러다니던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나지만, 내용은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강렬한 제목만큼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각인돼 있다. 그만큼 잘 지은 제목이고,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큰 역할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과거를 후회하고,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 시간을 더 잘 보냈을 거라고 자위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고, 내가 가장 열망하는 '그때'는 대학 시절이다. 난생처음 부모님, 학교의 통제를 벗어난 삶. 경제적 자유를 빼고는 사실상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 주변에 휩쓸려 수강신청을 하고, 밤이 되면 우르르 술을 마시러 가고, 주말에는 가끔 집회에 나가가 사회를 걱정하며 지식인 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불안한 미래에 실용적인 일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험 기간이 닥쳐서라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적당히 학점 관리도 하고, 영어를 공부하며 교환 학생에도 다녀왔다. 


그럭저럭 무난한 대학 생활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으나 나는 여전히 아쉽다. 인생에서 '무용(無用)'한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를 흘려보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무용함이란 당시 취직이나 대학원 진학 같이 미래 준비에는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무용함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전공과 아무 상관없는 물리학, 의학 강의도 듣고, 서양사, 미술사, 중국 고전도 파보고, 불어, 산스크리스트어, 라틴어도 공부했을 텐데.


책을 통해 그런 대학 생활을 보낸 저자를 만났다. '공부의 위로'를 쓴 곽아람 작가다. 조선일보 출판팀장으로 언론계 선배이기도 하다. 뉴욕에 오고 나서 뉴욕에 관련된 책을 찾다가 저자의 '나의 뉴욕 수업'이란 책을 알게 됐다. 전자책이 나와있지 않아 당장 구할 길이 없어 아쉬워하던 차 전자책으로 출간된 저자의 다른 책들을 읽게 됐다. '공부의 위로'가 그중 하나다.


서울대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저자는 40대가 된 지금 알차게 공부했던 학부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수강한 수업과 그로 인한 사유의 변화를 소개하며 오늘날 자신이 있게 한 '지(知)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미술사 입문과 같이 저자의 전공 관련 과목이 다수지만, 심리학, 법학, 라틴어 등 꼭 필요하지 않았던 수업에 관한 글도 많다. 그리고 그 시간과 노력은 고스란히 쌓여 저자의 교양이 됐다.


  


"무용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고, 쓸모없는 것을 배우리라 도전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젊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그 시절 무용해 보였던 수많은 수업들이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역사, 철학, 미술, 음악, 언어..(보기에 따라)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는 나지만, 돌이켜보면 삶의 갈림길에서는 늘 당장 실용적으로 보이는 선택만 해오지 않았나 싶다. 인문학에 관심이 갔지만, 문과 중에서 그나마 쓰임새가 많을 것 같은 사회 과학을 택한다던지,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밥벌이가 시급하니 취직 준비를 한다던지. 물론 내 기준에서는 늘 타협을 하긴 했다.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며 역사 수업을 듣는다던가, 일반 회사 말고 언론사에 간다던가... 하지만 늘 어정쩡했고 마음껏 무용한 것들을 추구한 시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12년간 몸 담았던 직장을 떠나 아무런 사회적 소속 없이 뉴욕에 머무르고 있는 삶. 내게는 지금이 바로 '획기(劃期)'가 아닌가.



..."앞의 글자는 '획을 긋다'라고 할 때의 획이에요. 이 단어는 '획기'라고 읽습니다. 흔히들 '획기적'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앞 시대와 획을 그어 확연히 구분될 만큼 다른 시기가 왔다는 말이에요."

... 인생의 한 챕터를 마치고 다음 챕터로 넘어갈 때마다 생각한다. '이건 획기적인 일이잖아.' 새로운 세계와 묵은 세계 사이에 굵고 확실한 선을 긋고, 후회 없이 나아가리라 마음먹는다.



뉴욕에서 어떻게 하면 실용적인 시간을 보낼까 아등바등하면서도 결국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6개월을 흘러 보낸 나. 이 책은 어쩌면 대학 시절, 취업 준비생이던 그 시절을 반복하고 있는 나에게 이번만큼은 달리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남에게 기대지 않고 혼자 거듭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훈련을 하게 되었으니까. 명료한 답이 나오지 않아도 좋다. 이 지(知)의 여정은 나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인문학의 기본은 긴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상머리에 묵직하게 앉아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공부의 기본은 언제나 아날로그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수업이 그걸 가르쳐주었고, 나는 그 덕분에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책을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Interior with Woman Reading' Nybo, Poul Friis (1869-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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