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백지 연습장을 꺼내며
어려서 백지 연습장을 좋아했다. 줄도, 모눈도 없는 텅 빈 종이를 스프링으로 묶은 연습장 한 권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연습장에 30cm 자를 대고 달력을 그려 플래너를 만들었고, 책을 읽다 발견한 좋은 문구를 적어 넣었으며, 머리를 쥐어뜯으며 수학 문제를 풀었다. 수능 시험이 끝난 뒤에는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라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대본을 써내려 가기도 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알아차릴 필요도 없어 그저 재미있어서 수십 장을 채웠다.
언젠가부터 백지 연습장을 잘 찾지 않게 됐다. 성인이 되고부터였던 것 같다. 중고등학생이 드나드는 문방구 노트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대학생 때는 매번 학교 이름이 적힌 플래너를 썼고, 필기에도 줄노트를 이용했다. 전공이 정치외교학이었던 만큼, 과제든 시험이든 글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줄이 그어진 종이에 손으로 글을 써내는 시험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줄노트로 공부하는 게 제일 효율적이었다. 취직을 하고 나서는 업무용 메모는 회사 다이어리에, 개인 일정과 일기는 스타벅스 다이어리에 적는 게 익숙해졌다.
백지 연습장에서 멀어진 시간이 길어진 만큼 내 삶에도 틀이 생겼다. 특히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줄이 그어진 노트처럼 따라 써야 할 선이 생긴 것만 같았다. 줄의 간격이 좁든 넓든 그 안에서 삶을 써내려 가야 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안정적’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선 덕분에 억지로라도 규칙적인 생활을 이어갔고, 업무용 글을 꾸준히 생산했다. 무려 12년 동안. 중간에 6개월 간의 아프리카 특파원 생활과 1년 휴직 및 영국 석사 유학이라는 변주가 있었지만, 변수는 아니었다. 나는 늘 틀 안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달랐다. 2023년 4월 중순, 나는 회사를 그만뒀고 뉴욕으로 이사를 왔다. 짝꿍의 주재원 발령이라는 좋은 ‘구실’ 덕분이다.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 구실이라고 굳이 이야기하는 이유는 나에게 선택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오랜 유학생활로 해외 생활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짝꿍은 회사의 제안에 내켜하지 않았다. 거절하면 그만이었지만, 나는 짝꿍을 설득했다. 선을 벗어나 다시 백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포털이 잠시 열렸는데,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역시 삶의 전환점 앞에서 걱정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호기심은 두려움보다 힘이 세다.
더구나 작가 김수진이, 그러니까 내가 첫 책 ’ 폴레폴레 아프리카’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인생에서 여러 경험과 다양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생각과 느낌이 차곡차곡 쌓이고, 이러한 것들이 다시 삶의 안내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GPS는 계속 변한다. 더 튼튼해지고 나아진다…이 새로운 경험, 사람들 덕분에 나의 GPS는 또 한 번 업그레이드된 것 같다. 이번에는 또 어디로 운전대를 돌리라고 이야기를 해주려나?”
‘박사 해야지?’, ‘박사 공부하려고 한 것 아니야?’, ‘뉴욕에 좋은 학교 많잖아….’ 회사를 떠나며 여러 번 들었던 말이다. 회사 혹은 동종업계 선배, 동료들로부터다. 감사하고 현명한 조언이다. 이미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내가 뉴욕에서 보낼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룰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예측 가능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박사 과정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뉴욕에 있는 학교에서 박사를 하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부분 해당 학교(적어도 미국 교육기관)의 석사부터 밟아야 했고, 석사를 다시 하고 박사를 하고 싶을 만큼 하고 싶은 학문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런 마음으로 박사 과정을 추구하는 일은, 내가 오랜 기간 살아온 대로, 선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선택처럼 느껴졌다.
대신 뉴욕을 공부하기로 했다. 8개월 정도 살아보니 뉴욕은 지구상 현존하는 최고의 인류 학습장(學習場)이다. 인구 약 834만(2022년 뉴욕시, 미 정부 인구통계). 939만 인구 수도 서울을 보유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겨우?’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으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봐야 한다. 인구 밀도는 잠시 미뤄두고, 인구당 다양성 밀도로 뉴욕을 이길 곳은 그 어떤 도시도 없다. 5명 중 1명이 중남미 국가는 물론, 중국, 한국, 인도, 러시아, 이탈리아, 터키 등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이주한 이민자인 곳. 제각각 800종류의 언어를 쓰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이 뉴요커라는 이름으로 한 데 엮여 살아가는 곳, 거리로 나갔다면 영어 이외 언어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밖에 없고, 시정부에서 공식 문서를 영어 + 12개 언어로 번역해 제공하는 곳.
문화, 인종, 언어의 다양성뿐만이 아니다. 길 위의 홈리스부터 하늘을 찌를 듯 한 ‘빌리어네어스 로우(Billionaire’s Row)’의 한 빌딩 펜트하우스에 세컨드 하우스가 있는 자산가까지, 사실 문화보다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른 삶의 차이가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이 뉴욕이다. 호화 상점이 밀집한 5th 애비뉴를 걷다 보면 명품샵만큼이나 짝퉁을 파는 노점상이 많고, 양쪽 모두 손님이 몰리는 모습이 뉴욕의 단면을 잘 보여주지 않나 싶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아이러니가 혼재한 이곳이야 말로, 사람과 세상을 배워서 익히고, 나아가 나를 알기에 최적인 곳 아닐까?
2018년 여름부터 약 1년 동안 뉴욕대(NYU) 인스티튜트 오브 파인 아츠(IFA)의 방문연구원으로 체류하면서, ‘나의 뉴욕 수업’이라는 견문록을 펴낸 곽아람 작가(이자 기자 선배) 역시 이렇게 말했다.
“뉴욕에서의 매 순간이 내겐 수업이었다. 학교도 다니고 크리스티 에듀케이션 과정도 밞았지만, 교실 밖에서도 많은 걸 배웠다. 오페라를 보고, 여행을 하고, 혼자 사는 생활을 잠시 멈춰 룸메이트들과 함께 살고, 미국 사회의 이모저모를 숙고하고,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하면서 결국은 ‘나란 어떤 인간인가’를 배웠다.”
나 역시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낯선 풍경 속에서 뉴욕을 공부하기로 했다. 나를 알고 넓히기 위해 다시 백지 연습장을 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