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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의외로?) 육아하기 좋은 도시

by 김수진

뉴욕이라고 하면 왠지 육아와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2-3년마다 해외를 떠돌며 일하는 배우자를 둔 내 친구도 다음 부임지로 스위스 혹은 뉴욕을 두고 고민하더니 결국 스위스에 갈 것 같다고 했다. 뉴욕을 좋아하지만 아이를 키우기에 적합할 것 같지는 않다는 이유였다. 대학 때 일주일 간 뉴욕에 가본 게 전부였던 나는 당시 친구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재밌는 곳이지만 복잡하고, 더럽고, 마냥 안전하게 느껴지는 도시는 아니니까. 내가 곧 뉴욕으로 이주를 앞두고 있던 만큼 친구와 같은 타지에서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쉬웠지만 아이는 좋은 환경에서 키워야 하니까, 친구의 선택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나는 뉴욕에서 아기를 낳았다. 이곳에서 1년 가까이 아기와 생활하며 생각이 바뀌었다. 뉴욕은 여전히 복잡하고, 더럽지만 (의외로?) 육아하기 좋은 도시다.


뉴욕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다. 인종, 종교, 국적, 언어와 같은 정치, 문화적 요소는 말할 것도 없고, 부, 지능, 품성, 체격, 취향, 교육 수준 등등 사람을 가늠하는 세상 모든 기준을 갖다 대더라도 전 세계에서 가장 퍼진 분포도를 가진 도시가 뉴욕이라고 확신한다. 덕분에 내가 사분면 어디에 위치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유별난 축에 끼지도 못한다. 플랫아이언 상점에서는 손톱에 고운 연분홍 매니큐어를 바른 남자 직원이 생긋 웃으며 치수에 맞는 운동화를 찾아주고, 미드타운 시내버스에서는 물리적으로 좌석 두 개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큰 체격의 여성이 정중하지만 당당한 태도로 다른 승객에게 자리를 비워달라고 부탁한다. 타임스퀘어 지하철 역에서는 주황 의복을 갖춰 입은 크리슈나 교도들이 흥겹게 북을 치며 만트라를 반복한다. 역 밖으로 나오면 두 손이 없는 기타리스트가 팔꿈치로 현란한 연주 실력을 뽐내며 사람들의 발길을 멈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이 다양한 뉴요커들이 서로의 다름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약자'도 다름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것 같다. 아기를 유아차에 태우고 뉴욕 곳곳을 누비며 든 생각이다. 만원 버스에 유아차가 오르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사람들은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 주려 몸을 움직이고, 자리를 내준다. 아기가 귀여워서? 그것도 한몫하겠지만 존중과 배려의 힘이 휠체어를 탄 사람, 주행 보조기구에 의존해 걷는 노인에게도 똑같이 발휘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한 번은 나 포함 세 대의 유아차에 휠체어 한 대까지 들어찬 만원 버스를 타고 집에 온 적도 있다. 속마음이야 모르지만 겉으로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내려야 할 때 주변 승객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긴 했다. "이봐요들, 여기 이분들 내리니까 공간 좀 만들어요!"라고.


아기와 함께 갈 수 있는 프로그램은 어찌나 많은지.. 일단 웬만한 도서관마다 '스토리타임'이 있다. 스토리타임은 사서가 아기들, 어린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시간인데 운영은 담당 사서 재량이다. (미국은 짜인 틀보다 웬만해선 담당자의 재량이 더 큰 곳인 것 같다) 나는 주로 5번가에 있는 도서관에 가는데 이곳은 제법 큰 곳이어서 지하에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 있고 5명의 사서가 매주 돌아가면서 스토리타임을 한다. 어떤 사서는 동화책을 읽기보다는 노래와 율동을 많이 하고, 아기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우리 딸 포함 아직 1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 아기들은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는 노래하고, 율동하고, 노는 시간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도서관은 여름 내내 매주 목요일 어린이 콘서트를 열었다. 어린이 콘서트라지만 진짜배기 뮤지션들이 공연을 하기 때문에 엄마도 신이 난다. 육아 스트레스도 풀고, '오늘은 또 뭘 하고 놀아주나' 고민도 해결해 준다.

IMG_3557.jpeg 뉴욕 공립도서관 스토리타임


뉴욕에는 여름 내내 도시 곳곳에서 매일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데,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도 많다. 나와 아기도 피어 57 루프탑에서 하는 어린이 콘서트, 링컨센터 써머 스토리타임에 다녀왔다. 이런 정보는, 스토리타임에서 만난 엄마들이 공유해 준다. 나도 뭔가 재밌는 걸 발견하면 무조건 초대한다. 같이 가면 더 재미있으니까!


사실 이런저런 행사를 쫓아다니지 않아도 갈 곳은 많다. 뉴욕에는 공원이 참 많고, 웬만한 공원은 다 좋다. 센트럴 파크에 가면 '뉴욕의 중앙 공원'답게 널찍한 공간에 자리를 잡고 피크닉을 나온 뉴요커들 구경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심지어 동물원도 있다!) 브라이언트 파크에서는 주변에서 커피 한 잔 사가지고 잔디밭을 둘러싼 철제 의자에 앉아 멍 때리는 재미가 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워싱턴 스퀘어 파크, 심지어 우리 집 바로 옆 허드슨 리버 파크도 돗자리 한 장만 깔고 누우면 천국이 따로 없다. 파란 하늘, 시원하게 흐르는 허드슨 강, 카약 타는 사람들, 여름 최고의 대중교통 NYC 페리, (어디서나) 달리는 사람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 수영복만 입고 선탠 하는 사람들... 풍경 구경, 사람 구경하는 나와 아기도 어느새 풍경의 일부가 된다.


이런 순간들 덕에 육아를 하는 와중에도 숨통이 트인다. 나도, 아기도 (주말에는) 짝꿍도 더 자주 웃는다. 그러니 내가 뉴욕을 사랑할 수밖에...


IMG_3974.jpeg 다리 한쪽을 유아차 안전바에 올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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