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도 학교에도, 아무런 소속이 없었던 나는 거의 매일 5th 애비뉴에 있는 뉴욕공립도서관(NYPL)에 갔다. 도서관 게시판에는 북클럽, 북토크부터 코딩, 재테크, 커리어코칭 등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 홍보물이 붙어있었다. 그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스튜디오 워크샵’이었다. 내가 드나들던 도서관은 NYPL 브랜치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큰 곳 중 하나였고, 도서관 안에 녹음이나 영상 촬영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가 있었다. 사설 스튜디오를 대여할 형편이 되지 않는 뮤지션, 팟캐스터 등 지역 아티스트들을 위한 시설로 크기는 작았지만 설비만큼은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수준급이었다. 녹음 부스와 믹싱 기기가 마련돼 있었고 이용할 수 있는 마이크도 다양했다. 심지어 스튜디오 담당자 중 한 분은 NPR의 간판 음악 프로그램 ’Tiny Desk’ 엔지니어 출신. 숏컷에 나보다 키가 조금 작고 시원한 미소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티나로 해두겠다.)
이 스튜디오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두 번의 워크샵에 참석해 스튜디오와 설비 사용법을 익힌 뒤 담당자 앞에서 시연을 해야 한다. 나는 이 워크샵에 참석하고, 시연에서 어버버 했지만 관대한 티나의 도움 덕분에 통과했다. 하지만 이 무료 스튜디오는 당연히 인기가 많았고 예약이 치열해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아티스트 친구를 얻은 것이다. 이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아티스트들의 결과물을 발표하고 축하하는 자리가 있다길래 구경을 갔는데, 키가 멀대같이 크고 금발 머리가 어깨까지 찰랑거리는 한 뮤지션의 음악이 참 좋았다. 그의 이름은 Eisley Constantine.(편의상 아이즐리로 부르겠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온 뒤 용기를 내 오지랖을 부렸다. 아이즐리는 무척 친절했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얼마 전에 한국에서 라식 수술을 받고 왔다고 했다. 음악이 참 좋다고 했더니, 내가 1호 팬이라며 자신의 CD를 선물했다.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했고, 며칠 뒤 다운타운 근처에서 만나 커피를 마셨다. 햇살이 따가운 7월이었다. 아이즐리는 라커웨이 해변에 가보지 않았다고 하자, 지금 가보자며 NYC 페리 타는 법을 알려줬다. 살아온 이야기, 좋아하는 책 이야기를 많이 했다. 영어가 부족한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고, 띄엄띄엄 말했다. 그에게 ‘데이잡(day job)’이라는 말을 처음 배웠다. 미국 문화 수도 뉴욕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모여든 아티스트들이 전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많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하고 싶은 일로 번 돈만으로 뉴욕에서 생계를 꾸리기는 불가능하기에, 카페에서, 식당에서 ‘데이잡’으로 돈을 벌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하는 일을 한다. 아이즐리도 그중 하나였고, 카페에서 서빙을 하고 틈틈이 피팅 모델, 영화 촬영 현장에서 엑스트라 일을 한다고 했다.
이후 아이즐리와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은 연극 무대에 서게 됐다고 연락이 왔다. 뉴욕에는 생각 이상으로 많은 소극장이 있고, 프로부터 아마추어들의 작품이 수시로 오르고 내린다. 반가운 마음에 티켓을 예약하고 공연장에 갔다. 두 편의 연극이 무대에 올랐고, 각각의 극이 끝난 뒤 배우, 감독과의 문답 시간이 이어졌다. 첫 번째 공연은 극을 공부 중인 여성 감독님의 작품으로 귀여운 커플이 주인공인 SF였다. 아이즐리가 출연한 두 번째 극은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종교, 인종 문제 등을 다룬 일종의 부조리 코미디극이었는데 감독님부터 배우 분들 모두 프로페셔널이었다. 부족한 리스닝 때문에 100% 소화하지는 못했지만 두 작품 다 매력이 넘쳤다.
문득 그레타 거윅이 연극을 하던 시절 바로 저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무대에도 오르며 꿈꾸던 시절. 실제로 그가 연출한 영화이자 내가 좋아하는 ‘레이디 버드’나 ‘작은 아씨들’에서는 연극 공연 장면이 등장한다. 특히, 연극을 하던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고향 새크라 멘토의 가족을 떠나 동경하던, ‘문화가 있는’ 뉴욕으로 이사를 하고야 만다. 그레타 거윅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가 극본을 쓰고 연출한 만큼 자신의 일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뉴욕 소극장에서 만난 연극 연출가와 배우들의 모습에서 그레타 거윅을 떠올린 게 부자연스러운 일만은 아닌 듯하다.
오늘 웨스트 빌리지에서 또 다른 그레타 거윅을 만났다. 영화와 연극 무대를 오가며 활동하는 주은 배우님이 출연하는 연극을 보고 왔다. 2051년 뉴욕을 배경으로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 인간다움을 묻는 SF극이었다. (이번에도) 대사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주제 자체가 흥미로웠고, 프로 배우들의 열연을 코앞에서 볼 수 있었던 덕분인지 인터미션 없는 1시간 50분 내내 몰입했다. 주은 배우님 역시 브루클린의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인디부터 상업 영화까지, 광대극부터 SF극까지 다양한 예술 실험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데 카페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지금 그녀의 삶은 뉴욕을 휩쓰는 무용수를 꿈꾸며 브루클린의 아파트에서 룸메이트와 사는 ‘프란시스 하’에 가까울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프란시스 하를 연기한 그레타 거윅을 뛰어넘는 배우, 스토리텔러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