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리드는 진정한 노마드 워커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100% 재택근무를 하는 그는 일 년의 40%(본인은 30%라고 주장하지만, 내가 볼 때는 절반에 가깝다) 정도는 해외여행 중이다. 가끔 연락해 보면 카카오톡으로 대만, 일본, 한국, 중국의 밤거리를 누비는 영상을 보내온다. 왈리드를 만난 건 한국어-영어 언어 교환 모임에서였다. 파키스탄 이민 가족 2세로 LA에서 자라 UCLA 물리학과를 나온 수재인데, 9.11 테러로 무슬림을 차별(혹은 혐오)하는 분위기가 학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바람에 조용한 10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대학에서 (역시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는) 중국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며 동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 관심이 한국어로까지 뻗쳤다.
미안하지만 왈리드의 한국어 실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미안해, 근데 알지? ㅎㅎ) 내가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 잘 있었어?’라고 운을 떼긴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상의 대화는 영어로 해야 우리의 우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도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꼭 봐야 한다고 추천하고, 강수지의 ‘보랏빛향기’를 즐겨 듣는 그의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왈리드는 관광객은 모르는 브루클린 찐로컬 맛집에서 피자를 사주고, 웨스트 빌리지 파이브가이즈 2층에 간판도 없이 숨겨져 있는 바도 알려줬다. (파이브 가이즈로 들어가서 계단으로 올라가야 나오기 때문에 모르면 절대로 알 수가 없다!) 술을 마시지 않는 자신은 무알콜 칵테일을 홀짝이면서 홀짝홀짝 잔을 비우는 나를 흐뭇하게 지켜보곤 했다. 우리는 브루클린-맨해튼을 잇는 L트레인으로 오기 좋은 유니언 스퀘어 근처에서 자주 만났다. 뉴요커 1년 차 시절 약속 장소를 헷갈려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기다리는 바람에 유니언 스퀘어에서부터 열심히 달려오게 만든 건 안 비밀.
그러고 보니 유니언 스퀘어 근처에서도 자주 만났다. NYU가 인근에 있어 뉴욕 치고 그나마 가격이 합리적인 식당들이 많고, 중국, 대만, 일본 등등 맛난 아시안 레스토랑이 밀집해 있다. (한국 식당은 별로 없다. 아마도 K타운이 가까워서 그런 것 같다.) 저녁에 가면 식당이고 카페고 술집이고 젊은 친구들이 북적북적해 홍대 느낌이 난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매운 요리를 시켜 먹으며 아메리칸 다이닝으로는 채울 수 없는 마늘과 고추와 각종 향신료를 보충했다. 마라 샹궈의 영어 이름인 dry pot도 먹고, 늘 대기 손님이 늘어서있는 시추안 식당에도 자주 갔다. 마지막에는 보바티(버블티)나 망고 빙수로 입가심을 했다.
뉴욕 산지 10년이 훌쩍 넘어 맛집을 꿰고 있는 그가 여기 저리 데려가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심지어 매번 밥도 사주려고 한다. 백수인 내가 불쌍한가 보다. 물론 나보다 훨씬 돈을 잘 벌긴 한다 (야, 누나도 12년 동안 일해서 돈 있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지향하는 나 역시 열심히 카드를 내밀기 때문에 우리는 계산서를 붙잡고 아웅다웅하는, 뉴욕에서 보기 드문 풍경을 연출하곤 한다.
아참, 그러고 보니 왈리드가 잘하는 한국말 중에 ‘누나’도 있다. ‘누나, 누나’ 하면서 있지도 않은 여동생을 자꾸 소개시켜달라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맛있는 걸 많이 사주나 보다. 그러니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여동생 있으면 우리 왈리드 좀 소개시켜주세요. 착하고, 똑똑하고, 능력 있고, 심지어 얼핏 보면 3초 정도는 조지 클루니로 보이기도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