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의 언젠가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약 10개월 동안 나는 손 하나를 쓰지 못하고 살았다. 비유적인 표현 같은 게 아니라 정말로,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왼손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넷이 굽어진 상태로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리 신호를 줘도 움직이지 않는 몸의 일부가 있다는 건 기괴한 경험이다. 그렇게 낯설어져 버린 손은 ‘그것’이란 명칭이 더 어울렸다. 촉각은 멀쩡했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이 내 몸의 일부임을 느낄 수 있어서 더 기괴했다. 가령 무언가에 찔렸다던지 하면 똑같은 아픔을 느낄 수는 있었는데 나의 의지와는 분리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예를 들어 나는 ‘귀’를 내 몸의 일부로 느끼면서도 움직일 방법을 알지 못하지만 거기는 애초에 움직일 거라 기대했던 적이 없으니까. 귀는 그냥 거기 있으면서 감각할 뿐, 무언갈 집어먹는다던지 혹은 악수를 하거나 드럼을 칠 순 없으니까.
그 10개월은 지금까지 내 삶에서 가장 불확실성으로 가득했던 시기였다. 의사들은 뼈부터 시작해 피를 뽑고, 근육, 신경, 뇌까지 들여다봤지만 무엇도 찾아내지 못했고 난 이 병원 저 병원으로 떠넘겨지며 영국 의료시스템의 후진성에 치를 떨었다.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이라 해도 그 상황의 원인과 지속기간을 대충이라도 알 수 있다면 계획을 세울 수가 있다. 그런데 난 내 몸이 왜 이런지도, 언제 나을지도 알지 못했으며 한창나이에 취업은 무기한 연기가 되고 있었다. (문서작업이 직무의 팔 할인데 타자를 칠 수가 없으니까.)
점점 미괄식이 되어가는 이 글이 더 멀리 가기 전에 오늘 이걸 써야만 했던 이유를 말하자면, 지난주부터 왼손의 이상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익숙한 재앙의 냄새. 웃프게도 줌콜 중에 누군가에게 엄지 척을 날리려다 그 냄새를 맡아버렸다. 그날부터 나의 엄지는 45도 각도에서 올라오길 거부 중이다. 그리고 정밀검사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받아 내일 신경외과 외래진료가 잡혀있다. 손을 주무르며 어떻게든 오늘이 가기 전에 글을 하나 남겨놓겠다고 키보드를 두들기는 중, 불현듯 얼마 전 누군가에게 받은 질문이 생각났다.
‘당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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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 낙천주의요.’
질문을 받자마자 생각났는데 왜 하필 저 단어의 조합이었는지 나도 알 수가 없어 며칠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결국 무엇에 대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간도 깊숙이 들어가 보면 분명 어떤 믿음 위에 서있다. 나의 낙천주의는 결국 내 삶이 어떻게든 최선의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기본적으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삶의 태도지만 그게 생에 대한 무책임이 되지 않으려면 나름의 근거가 필요하다.
나의 낙천주의는 10개월 동안 혹독한 시험대에 올랐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던 긴 시간을 꽤 잘 견뎌냈다. 미야모토 테루가 공황장애를 거치며 작가로 거듭난 시간을 회고하며 쓴 것처럼 삶은 신비로우며,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땐 그저 견뎌야 할 때도 있고, 결국 그 시간이 나를 어디론가 이끌 것이라는 것. 인생사 새옹지마, 흔한 말이지만 이걸 체험적으로 안다는 건 삶을 바라보는 데 큰 차이를 만든다. 익숙하고 불편한 예감 앞에서, 6년 전 10개월의 시간이 나에겐 단단한 근거가 되었음을 느끼며.
… 그래도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제길!
“생의 힘에는 외적 우연을 곧 내적 필연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갖춰진 법이다. 이 사상은 종교적이다. 그러나 공상적이진 않다 …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것이다. 이 한 글자 차이가 가지는 의미는 깊고도 크다.” (미야모토 테루, 생의실루엣 p.82)
(‘비관적’ 낙천주의인 이유는 내가 삶의 디폴트 값은 고통이고 고난이라고 믿기 때문인데 사실 별 깊이는 없다. 그냥 왠지 낙천주의 앞에 비관적을 붙이면 좀 덜 나이브해 보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