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번쩍 들었던 순간
어느 한가로운 봄날, 이른바 백호군단이라고 불리우는 네 명의 절친한 친구들 중 두 사람인 호열과 대남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한가로이 거리를 걷고 있다. 그들은 지역에서 유명한 문제아 군단이고, 싸움질 외에는 별로 하는 일이 없는 한량들이다. 그나마 그들의 낙은 백호가 여학생들에게 퇴짜를 맞는 것을 구경하는 일. 그런데 그마저도 백호가 농구부에 들어가면서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대남은 갑자기 농구에 빠져버린 백호가 서운하다는 듯 연신 심심해 죽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 그에게 호열이 이야기한다. “대남아, 너도 뭔가 할만한 일 찾아보지 그래?” 고등학교 1학년. 같이 마냥 한심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친구가 갑자기 무언가에 열중하기 시작하니 자신도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병철이 박사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았을 때 내가 그런 기분이었다. 이병철은 나보다 두 살 형이고 나처럼 시인이다. 문학을 사랑해서 대학원에 들어와 나와는 박사과정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문학만큼이나 술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유별나게 낚시를 사랑해서 오래도록 학위를 받지 못한 채 대학원에 남아있는 ‘장기수’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낚시를 음악으로 바꾼다면 나의 자기소개가 된다.
어느 날 대학원 동계 워크샵 날, 지루한 논문 발표 시간이 끝난 뒤에야 슬그머니 도착해 워크샵 장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논문 발표에 참석하지 않은 것을 만회하기 위해 트렁크에서 기타를 꺼내다가, 나와 생각을 하며 트렁크에서 갓 잡아온 쏘가리를 꺼내는 이병철을 마주친 일이 있다. 등록금이 비싼만큼 성실하게 공부에만 집중하는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우리는 술이 좋고 낚시가, 음악이 좋아서 수업에 결석하기도 하고 대학원 행사를 뒤로한 채 낮술을 하러 가곤 했다. 이제는 그가 나의 공연을 보러 오고, 내가 그의 낚시여행을 따라다니기도 하며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런 이병철이 언젠가부터 이대로는 안되겠다며 박사논문을 써 버리고는 졸업을 해버렸다. 주변의 어떤 동료들이 논문을 완성해도, 심지어 까마득한 후배들이 박사학위를 받아도 별로 동요하지 않았는데, 그가 논문을 완성하니 갑자기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얼른 공부를 마치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열심히 해 봐야겠다-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백 마디 말보다, 성실한 사람들이 이루어낸 눈부신 성과들에 대한 소식들보다, 함께 농땡이를 피우던 친구의 작심 하나가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어쩌면 내가 지금 그나마 사람 구실하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나처럼 한심했지만 결국 정신을 차리고 만 고마운 친구들 덕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