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매일> 연재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성공한 이들의 TV, 그리고 미란이
강백수
코로나 19 감염자 수가 연일 세 자릿수를 기록하는 가운데 내가 살고 있는 수도권 지역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2.5단계로 격상된 지 며칠이 지났다. 틈나는 대로 전시회 보는 것을 즐기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만나 소주 한 잔 씩 나누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으나, 아무래도 외출을 삼가야 하는 시기이니만큼 나의 삶은 여러모로 달라졌다. 커다란 변화를 꼽자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되면서 TV시청 시간이 대폭 늘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름 그대로 버라이어티한 버라이어티 쇼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간다. 그런데 요즘 TV프로그램들을 보면 과거에 느끼지 않았던 헛헛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 헛헛함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다가, 한 누리꾼이 SNS에 적어둔 짧은 글을 우연히 접하고 무릎을 탁 쳤다. “예전에는 가난하고 어렵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장애도 치료해 주거나 집을 고쳐주는 방송도 있었는데, 요새는 연예인들이 방송사 돈으로 국내외 여행가고 먹고 마시거나 준재벌 3세의 수십억대 아파트 소개하거나 가난하지 않은 연예인들 집 정리를 도와주는 방송들이 나온다. 방송들이 낯설다.”
코로나 19로 경기는 점점 어려워지는데, TV속에는 언제나 성공한 사람들이 나온다. 1인 가구의 삶을 조명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MBC의 ‘나 혼자 산다’에는 언제부터인가 강남이나 한남동 같은 곳에 수십 억대 주택에 사는 연예인들이 출연하고 있다. 처음에는 다소 협소한 빌라에 살거나 어딘가에 얹혀 살던 출연진들도 모두 고가의 주택에서 생활하며, 그들의 생활을 시청하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경제생활을 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 한 언론은 우리나라 1인가구 10 가구 중 4가구에 해당하는 38%가 월세로 생활하고 있으며 1인가구의 평균 연 소득은 2116만원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평균적인 1인가구 생활자의 시각으로 이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진과 자신의 삶 사이의 간극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심리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최근 ‘온앤오프’라는 프로그램으로 논란이 되어 누리꾼들로 하여금 ‘플랙스님 (Flex 스님)’이라 별명을 지어 부르는 등 수많은 원성을 듣는 승려 혜민의 사례는 어쩌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응집된 박탈감이 터져나오며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다른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프로그램에서 연예인들의 집과 일상이 공개된다. 그들의 집과 일상은 우리의 것과 다르다. 새로이 정리된 집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신박한 정리’의 출연진들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미니멀하게 정돈된 집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좁아터진 원룸에서 무슨 미니멀 라이프가 가능하겠는가. 그나마 정리가 가능한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넓은 집 덕분일 것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오는 귀여운 아기들, 그들의 부모가 돈 걱정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좁아터진 집에 발디딜 틈 없이 늘어놓은 아기 장난감들 탓에 인테리어고 무엇이고 포기해버린 가정을 본 적이 있는가?
과거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는 그런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MBC의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의 ‘눈을 떠요’라는 예능에서는 가난을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던 시각장애인들에게 개안수술을 해 주기도 했고,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인기코너였던 ‘신동엽의 러브 하우스’는 열악한 주거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사는 이들에게 주택 리모델링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보통의, 혹은 보통보다 조금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 새 희망을 주는 장면 장면은 충분히 감동적이었지만 이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만 등장하는 TV 속 세상은 국제 스포츠행사의 개최를 앞두고 거리의 부랑자들을 ‘청소’라는 명목으로 수용소에 가둬버렸던 어느 정권의 만행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이 꼭 방송사 제작진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제적 풍요만을 비추는 프로그램의 제작 배경에는 그러한 콘텐츠를 원하는 대중의 부추김이 필연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므로. 최근 일본에서는 만화 콘텐츠에 대한 소비 경향이 바뀌었다고 한다. 과거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같은 만화는 재능은 있으나 처음부터 모든 면에서 특출나지는 않았던 주인공들이 숱한 위기와 노력을 통해 성장하고 그 세계관의 최강자가 되는 모습을 그려내었다. 그런데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청년들 사이에서 노력으로 무언가를 달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식이 팽배하면서 새로운 경향의 만화 콘텐츠가 유행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순조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먼치킨’류가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현실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아예 비현실적인 세계에 몰입함으로써 현실을 망각하려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대중들도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언젠가부터 포기하게 되었고, (적어도 대중들의 눈으로 보기에는)애초부터 막대한 부를 갖춘 셀러브리티들의 삶 속으로 피신하고 싶어지게 된 것이 아닐까.
이처럼 허탈한 생각들로 TV를 보다가 특별히 눈길이 가게 된 프로그램이 있었다. 바로 힙합 경연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9 였다. 가장 주목받는 출연자는 아마 여성 랩퍼인 ‘미란이’일 것이다.
Hey new water new vv 난 알바 째고 무대 위
Yeah go get it go get it 가사 위 가난이 빛나지
안 가 무한리필 살아봐야겠어 내 빌딩 Yeah
개 같던 세상의 뒤통수 치러 왔지
더 크게 Callin’ ma name 모두 날 보고 놀래
‘ 미란이가 TV에’ 떼버려 Tag
사 새롭게 Yeah yeah 타고 비행
Skrr skrr 난 올라가 Skrr skrr 난 빛이 나
내가 뭐라 했어 Mom 꺼내겠다고 포차
맨 밑바닥의 소녀 엄마의 술병이 날 만들어
허기져 이를 꽉 물어 Chit chat bout me 덤벼 겁쟁이 너
VVS on ma neck 꿈 앞에 녹슨 팔찌 버려 문 앞에
구제 벨트 아직 허리에 원망하던 과거와 춤출래
-VVS 중 미란이 part.
포차를 운영하는 어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소녀가 랩퍼가 되고, 쇼미더머니9에 출전해 패자부활전을 통해 겨우 살아남더니 이제는 동료 랩퍼인 머쉬베놈과 함께 꾸민 무대가 유튜브 1000만 뷰를 돌파하고, 방탄소년단을 제치고 음원차트 1위까지 쟁취해내는 모습은 드래곤볼의 손오공이나 슬램덩크의 강백호와 같은 성장형 캐릭터들을 방불케한다.
그에게 열광하는 대중들이 이토록 많은 것을 보면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의 희망 스토리가 필요한 것 같다. 2021년에는 부디 보면서 주눅드는 TV보다, 보면서 희망을 얻는 TV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