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대한 우리의 대처법
긴 시간이 지났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독서/글쓰기를 다짐한 뒤 얼마 못 간 흔적의 잔재가 브런치 곳곳에 남아있었다.
(책의 순서가 1번 다음 바로 3번인 까닭이다.)
그간 글쓰기엔 상당히 소홀했지만, 그래도 독서는 '나름' 한 권 한 권 붙들고 연명하며 살았다.
그렇게 가끔 기숙사 형광등에 의지하여 아날로그 감성을 느껴오던 중, 올해 큰 변화를 맞이했다.
부서 이동을 통해 새로운 일을 접하게 되었고, 교대 근무 대신 나의 루틴이 생긴 것이다. 물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호되게 얻어맞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가만히 못 있는 내 성격에 뭔가 열심히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금세 타올랐다.
이를 계기로 다시 책과 가까워(지려고 노력)졌고, 감사하게도 술독뿐 아니라 다독(多讀)에도 뜻을 함께하는 동기들의 추임새가 그 의지를 더욱 다져주었다.
그렇게 선정한 첫 번째 책이 바로,
정유정 작가님의 '종의 기원' 이다.
띵작 중의 띵작 '7년의 밤'으로 알게된 작가님의 최근 신작으로 작년 말쯤 '독서소녀' 어머니의 추천으로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다.
'7년의 밤' 과 마찬가지로, 등장 인물의 섬세한 심리 묘사는 감정의 이입을 도왔고, 상세한 배경 묘사는 음산하기 짝이없는 방조제와 사건의 중심장소인 집 구석구석을 머릿 속으로 그려보기에 충분했다.
특히나 책 대부분이 주인공의 생각을 따라가며 진행되다보니 작가의 필력에 힘입어 내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 자꾸 고민하게 되었다.
(여기부턴 스포 有)
하지만,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면서 작가님의 필력, 주인공의 심리 등에 대한 생각은 함께 덮어버렸다. (아니 '덮어졌다'라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몇 쪽짜리 에필로그의 반전(개인적인 느낌입니다) 은 유진에게 붙들고 있던 실낱같은 연민의 감정을 모두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책의 중심소재인 사이코패스는, 최근 몇 년 간 입에 담기도 힘든 흉악범들을 통해 그 개념이 많이 알려졌다. 물론, 그들(이런 칭호도 그새끼들에겐 과분하다)에게 연민의 감정은 단 일도 없다.
하지만 유진에게는, 어린 나이에 부모의 무관심과 엄격함 속에서 자라야했던 주인공에게는, 그 환경 속의 아픔이 프레데터로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했을거라 생각했다. (제일 처음 세례식? 때의 유진의 심리를 보며 사랑받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을거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절대악(惡)' 이었다.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믿는 나에겐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주인공의 심리에 너무 몰입하다보니 충격이 더 크게 다가왔다.
책을 덮고 가장 먼저 유진에게 묻고 싶었다. '너 정말 이러기야?' 라고.
주변인뿐만 아니라, 부모님, 심지어 마지막까지 본인 스스로가 의지하고자 했던 형제 그 이상의 존재에게까지도 그럴 수 있냐고. 감정없이 정말 득과 실로만 모든걸 판단하는 악 그 자체였냐고.
중간중간 가뭄의 콩나듯 나오던 너의 감정기복도 그저 쇼에 불과했는지 등 유진에게 따져들거리를 생각하던 중, 한편으로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유진의 엄마라면 어땠을까,
아니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아직 출산의 기적을 경험해보지 못한 터라 의견을 구하기위해 어머니께 여쭈어보았더니,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만 키워야지."
그렇다. 부모에게선 자식이 사이코패스던 슈퍼맨이던 '어쩔 수 없이' 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령 그 아이가 유민이라는 내 인생의 절반을 앗아갔을지언정, 유능한 의사인 동생의 경고가 머릿속에 멤돌지언정, 내가 낳은 아이의 목숨을 어떻게 끊는단 말인가. 아니 자격이나 있는가.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자, 다음 고민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면 이 절대악을 치료할 수는 없을까?'
전문가인 이모의 소견으론 40세 이후 점차 누그러진다고 하지만, 그마저도 불확실해 보였다.
비록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이지만, 유진은 자신의 탄생을 선택하지도 않았으며, 사이코패스로 태어남에 대해선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강력한 포식자의 삶을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유진에게 치료(사이코패스를 병이라고 본다면)의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저 언제 발현될지 모르는 포악함을 두려워하며 유진의 엄마처럼 마음의 감옥을 설치해야 하나?
한창 성소수자(LGBT)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눈 적이 있다. 과거에 비해 세상은 많이 오픈되었고, 친구들도 그들의 방식을 이해한다는 입장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끝에는 항상 이런 단서가 붙곤 했다.
"근데 내 애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그렇다. 사람은 직접 처하지 않은 상황에선 상당히 객관적으로 대응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에게 찾아온 혹독한 현실에선 쉽게 판단할 수가 없다.
(이런걸 내로남불이라고 하던가?)
작가님의 의도처럼,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도 숨어 있을지 모르는 '절대악(惡)'에 대한 생각을, 그리고 나에겐 로맨스(?)일 그 상황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답없너'의 고민을 해보게된다.
어디선가 피냄새에 이끌려 밤거리를 거닐고 있을 유진은 그 답을 알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