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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믜 Sep 29. 2023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

워라밸은 커녕 내 것이 없던 일상에서 벗어나다

어른이 되고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면 내 삶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을 해왔다. 특히 나는 결혼 후 배우자와 함께 해외 생활을 하면서 더욱 많은 부분을 독립적으로 결정하고 감당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정부 지원도 없고 부모님 찬스도 쓰지 못한 채 외국인 노동자의 가정으로서 육아를 했고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부심도 생겼다. 한국에 있었다면 직장을 유지한 채 부모님에게 황혼육아의 짐을 지게 했을 텐데, 일은 못하더라도 육아를 내 힘으로 온전히 해내고 있으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한국에 귀국을 했고, 취업을 해서 워킹맘이라는 포지션이 되었다. 가정 운영과 육아를 온전히 책임지던 내가 임금노동을 시작했다는 것 만으로 내 삶의 여러 부분이 남의 손을 빌리게 되었다.


내 직장은 야근이 많았고, 근무가 유연하지 못했다. 재택근무는 웬만해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저녁에 아이를 먹이고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가 없는 날이 많아 결국 부모님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임금노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내 몸이 부서질 것 같아도 버텨가며 아이의 미디어 노출을 조절했다. 그러나 내가 출근한 이후부터 아이의 미디어 노출시간을 조절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작 다섯 살인 아이는 하루 5시간가량을 미디어를 봤고, 11시 넘어 잠을 잤다.


내 식구의 먹거리를 제 때 구비하고 관리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는데, 내가 집 밖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냉장고에 뭐가 있고 뭐가 소비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식재료가 상해서 버려져 나가도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있으니 냉동 인스턴트만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 몸뚱이 역시 엉망이 되었다. 철저한 식단 관리로 임신 전의 몸무게로 회복을 하고 체력을 키웠던 내 몸은 순식간에 몸무게가 도로 늘었고, 운동을 할 틈도 없었다. 운동을 할 시간마저 아이와 함께 해야 했기에 운동 시설 대신 홈트 프로그램을 등록했지만, 그마저도 아이와 더 충만한 시간을 보내려다 보니 하지 못했다. 아이를 재우고 난 이후에 종종 업무를 더 하려고 밤 11시에 에스프레소를 들이켜곤 했다. 아이를 재우다가 잠들어도 일어날 수 있도록 밤 12시에 알람을 맞췄다. 몽롱한 정신으로 일어나 몇 시간을 더 일하고, 쪽잠을 자고 다시 출근을 했다. 출퇴근을 하는 동안에도 일을 하기 위해 1시간 40분 출근길을 노트북을 메고 다녔다.


동물권과 기후변화에 기여하기 위해 채식을 하려는 내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직접 요리를 해서 먹는 게 가장 좋았지만, 야근이 많고 회사가 먼 워킹맘에게 요리는 사치였다. 가공식품으로 채식을 대신하기도 했지만, 건강한 식단을 할 수 없다는 게 스트레스가 되었다.


내가 야근이 많거나 몸이 좋지 않은 시기가 있으면 집은 순식간에 쓰레기장이 되고, 개지 못한 빨래가 누적되며, 화분에 심어 놓은 채소는 모두 시들고, 밀린 할 일이 늘어만 갔다. 임금 노동을 하는데도 왜 집안일은 여전히 온전히 내 몫인지.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이게 다 뭔가 싶었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집을 관리하지 못하고, 내 몸을 관리하지 못하고, 내 아이는 마냥 방치되는 삶. 대체 이게 뭐람. 내 삶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데도 임금노동을 유지하는 게 맞을까? 게다가 직장에서 하던 일 마저 내 것 같지 않았으니, 내 것이 아무것도 없는 채,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채 매일이 흘러가던 것이었다.


배우자와 해외생활을 결심할 때 했던 이야기가 있다. 직장 선배들 보니까 돈 벌어서 다 병원비로 쓴다고, 우린 그러지 말자고. 그런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다. 돈 벌어다가 아이 돌봄에 쓰고, 인스턴트식품이나 외식에 다. 평일을 아이와 충분히 보내지 못한 미안함에 괜히 주말마다 어디를 갈까 살펴봤지만, 아이는 그저 엄마아빠와 집에서 놀고 싶어 했다. 우리 집은 겨우 버텨냈지만, 살림 외주까지 했을 수도 있다.


일자리가 없다면서 누구는 과로로 죽어나간다. 부모가 아이를 돌보지 못해 학원뺑뺑이를 돌리고 아이들은 방치되고 조부모들은 쉬지 못한 채 황혼 육아를 한다. 대체 누구를 위한 삶일까.


일을 조금 내려놓은 지금은 행복지수가 늘었다. 내 집에 있는 식재료를 알맞게 활용해서 제시간에 식사를 한다. 식단 관리로 체지방을 다시 줄였고,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서 체력을 늘렸다. 피부는 더 좋아졌고 덕분에 화장품에 괜한 돈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와 등하원을 함께 하며 유대감을 높였고, 스트레스가 줄으니 아이가 보여주는 모든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할머니가 오시는 날이면 엄마아빠가 늦게 온다는 뜻이라 괜히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던 아이도, 이제는 할머니가 엄마아빠를 임시로 대체하는 사람이 아닌 엄마 아빠 외에 자신을 사랑하는 따뜻한 존재라고 느낀다.

이 사진은 내가 먹을 점심을 요리하다가 문득 너무 이 순간이 행복해서 찍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예 일을 놓은 건 아니다. 대체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출퇴근 시간을 절약했고, 아이를 재워놓은 밤에도 좋은 체력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소득전보다 줄었지만, 내가 주인이 된 이 일상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는데 확신한다.


야근으로 가득 찬 임금노동이 100이고 전업주부가 1이라면, 100을 꼭 한 번에 1 수준으로 포기해야만 되는 게 아니라 80이나 50 수준으로 줄이기만 해도 이렇게나 삶의 질이 높아진다. 누구나 필요한 시점에 일에 쏟는 수준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만 마련된다면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이다. 이렇게 살아도 유지가 되는 삶이 사치가 아니라, 당연히 어른으로서, 독립된 한 주체로서 가지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삶, 이게 내가 꿈꾸는 사회다.



* 이 글은 소정의 원고료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인구2.0 #경기도아이원더 #저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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