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믜 Oct 28. 2023

밖에서는 이렇게 모자라지 않을 텐데

유머 뒤에 숨겨진 내러티브가 기혼 이후의 삶에 미치는 영향

남편, 아빠들의 어설픈 모습을 재미로 풀어낸 콘텐츠들을 종종 본다. '아빠에게 아기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콘텐츠는 국내, 해외를 막론하고 수도 없이 본 것 같다. 최근에는 유부남들의 분리수거 현장에 대한 것이나 아내 몰래 숨겨온 비상금이 들통나는 콘텐츠들을 보게 되었다. 공감이 되고 재미있어서 이런 콘텐츠를 만든 분들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성인 남성이 이렇게 가정에서 뭔가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을 계속 재미로 넘겨도 될까.


유튜브 채널 '내얘기', '하이픽션'에서 유부남의 분리수거를 재미있게 풀어낸 콘텐츠, 이를 재생산한 릴스 화면 캡처



남자 여자 모두 동일하게 교육을 받고 경쟁을 해왔다. 남자들은 집 밖에서는 존경받는 상사 거나 형님이거나 선배일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집에서는 고작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거나 쓰레기 분리수거와 같은 쉽고 간단한 집안일을 처리하는 존재가 된다. ‘저  남자도 분리수거 담당이네'라며 불쌍한 처지로 그려진다. 


사실 분리수거는 쓰레기여서 불쾌함을 동반할 뿐 집안일의 난이도로 보면 가장 하수의 일이다. 태스크 자체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난이도가 낮으며, 잘못했을 때의 리스크가 적다. 아내들이 쓰레기 처리를 남편에게 시키는 것은 상위 난이도의 과업 대신 난이도는 낮지만 대신 불쾌한 거라도 하라는 의미가 크다. 


가사의 난이도가 어떠한지 예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령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의 과업을 '장보기 - 식재료 관리 - 요리하기 - 식사하기 - 설거지하기 - 음식물 쓰레기 치우기'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난이도가 높은 과업은 장보기, 식재료 보관, 요리에 있다.


장보기는 식재료를 어느 판매처에서 언제 얼마큼의 양을 얼마나 좋은 가격에 좋은 품질로 구매하는지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이번 주에 요리해서 먹을 시간이 안되는데 식재료를 많이 샀거나, 신선하지 못한 걸 샀거나, 샀는데 맛이 없거나, 유통기한을 잘못 봤거나, 다른 데서 할인하는 것을 나는 비싸게 샀거나 하는 일들은 전부 장보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다.


식재료 관리만만치 않다. 각종 재료의 특성에 맞게 냉장, 실온, 냉동, 밀봉, 수분 제거, 냄새 차단 등의 테크닉을 발휘하지 않으면 기껏 구매한 식재료가 상하거나 녹거나 변질되기 때문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


요리는 말할 것도 없다. 음식을 먹을 사람의 취향, 식습관, 영양을 고려한 메뉴를 선정하고, 메뉴에 맞는 재료와 양을 적절하게 취하고, 필요한 경우 미리 불리거나 자연해동을 하는 등의 시간 계산도 해야 한다. 본격 요리에 들어가면 맛이 있게 해야 하며, 요리가 끝날 시점에 여러 메뉴가 동시에 마쳐서 제 때 따뜻하게 대접해야 한다. 메뉴를 만드는 동안 다른 메뉴가 식어버린다거나, 불어버리거나, 짜게 되거나, 메뉴끼리 조화롭지 못하거나 하는 경우 실패한 요리가 되어버린다. 식재료를 낭비하는 꼴이 되고 식사는 기쁘지 못하게 마무리된다.


이것에 비하면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는 간단하다. 음식이 묻어 있는 식기를 깨끗하게 닦아내기만 하면 되며, 음식물 쓰레기는 모아서 밖에 버리거나 처리기를 이용하면 그만이다. 시간도 짧게 걸리고 리스크가 약하며, 방법이 명확하다. 앞 단계가 어땠는지와 관계없이 대체로 과업에 변수가 적다. 변수는 씻어야 할 그릇이나 쓰레기의 양의 차이, 혹은 냄비를 태웠을 때 같은 드문 경우 정도가 생길 수 있겠다. 그만큼 간단하기 때문에 어린이에게도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가사가 보기보다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카투니스트 Emma Clit는 'You Should've Asked'에서 이미 여성들의 끊임없는 정신노동에 대해 다루었고, 스탠드업 코미디언 Kerri Louise가 5년째 동일한 서랍에 있던 건전지를 어디 있냐고 찾는 남편에 대해 이야기한 영상은 13만 4천 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으며 많은 이의 공감을 샀다.


남성이 가사이나 육아에서 부족하다는 류의 콘텐츠를 반복해서 보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남성은 원래 이런 일을 잘 해내지 못하니 여성이 대신해주어야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어머니 세대에서 해온 것들이니 더욱 당연하게 여겨진다. 남성들이 잘하도록 노력할 기회도 주지 못한 채 여성들이 스스로 알아서 찾아서 해낸다. (대체로 속이 터지기 때문이겠지만) 결혼을 앞두거나 이미 결혼을 한 여성들에겐 이 모든 것이 짐이고 부담이다. 남성의 모자람이 당연시되면서 아내나 엄마가 떠안을 노동과 부담은 자연스레 여성에게 내재된다. 기혼이 되기만 해도 이런데 육아는 여성의 부담을 강화시킨다. 반면 여성들끼리 살면 이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남성들은 더 목소리를 내야 한다. 설거지나 쓰레기 처리 같은, 어린이도 할 수 있는 일 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밖에서 경제활동도 충분히 하고, 여성보다 더 버는 사람들이 왜 그 능력을 집에서 발휘하지 않는가? 발휘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레시피나 핫딜 정보는 검색만 하면 다 나온다. 아기를 안전하고 위생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몰라서 못할 수가 없다. 여성들 역시 남성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장보기도, 식재료 관리도, 요리도 남성이 못할 게 없다. 여성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이런 일을 알고 태어난 건 아니니까.




*이 글은 소정의 원고료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인구2.0 #경기도아이원더 #저출생

작가의 이전글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