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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믜 Apr 04. 2017

뉴욕 스타트업에서의 6개월

컵 대여시스템으로 지속 가능한 소비 생태를 만드는 소셜벤처 Vessel


디자인 전략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 한 친구가 뉴욕의 어느 카페에서 찍은 사진과 함께 제보를 보내왔다. 내 논문 프로젝트의 케이스 스터디 중 하나를 실제로 구현한 팀이 뉴욕에 있다는 거다. 그 다음날 다른 친구는 그 팀과 만나면서 나를 소개했단다. 아니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게 내가 Vessel과 인연을 맺게 된 시작이다.



스타트업에 발을 딛다


Vessel은 소비자가 음료 구매 시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빌리고 반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를 하는 스타트업이다. 이건 사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나 역시 졸업논문 프로젝트의 여러 케이스 스터디 중 하나로 연구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걸 실제 카페에서, 그것도 일회용품의 천국인 뉴욕에서 하는 팀은 흔하지 않았다. 친구가 소개해 준 덕분에 만남을 가졌고, 공통 관심사 덕에 어렵지 않게 합류할 수 있었다.


Vessel은 카페에서 고객에게 일회용 컵 대신 스테인리스컵을 제공한다. 고객은 컵을 사용하고 Vessel 가맹점 어느 곳에든 컵을 반납할 수 있다.


내가 이 팀에 들어갈 때 고려한 것은

이 팀이 내가 평소에 관심 있던 과소비와 쓰레기 문제를 똑같이 고민한다는 것, 

세상에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를 키우는데 공헌한다는 자부심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

개인적으로는 초기 아이디어를 키워내는 과정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목표,

산업디자이너에서 경험 디자이너 및 전략가로 경력 확장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란 기대,

전통적인 회사 형태와는 다르게 창의적이고 유연한 업무 스타일

이었다.


단, 스타트업이라는 특성상

급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취업비자 스폰서십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이 있었기에

무급인 대신에 내 경력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위주로 할 수 있도록 할 것

(내 통근거리가 워낙 멀어서) 출퇴근 시간과 근무시간은 내가 원할 때 유연하게 할 것

을 상의하고 시작했다.




Vessel에서의 6개월, 스타트업에서 일한다는 것


1. 경력자들의 리그

초기에는 각각 다른 역할의 팀원들이 모여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다는 점에서 학생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젠다를 정하고,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할 일을 정하고 일을 분담하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잘못한다고 점수가 매겨지는 것도 아니니 부담이 없었다. 게다가 목표와 관심분야가 같으니 일하기도 수월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역할이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팀원 모두 어느 정도 업무 경력이 있었기에 프로젝트가 알아서 진행되는 것이지, 신입이라면 내 포지션이 무엇이든 간에 혼자 스스로 일을 챙기는 건 어려운 환경이었다. 일을 주는 이도 없고 가르치는 이도 없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알아서 찾아 해야 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여도, 새로운 시각을 계속 전달하기라도 해야 했다.


2. 모두가 멀티플레이어

팀원이 적었기에 각자가 맡은 포지션이 있되 동시에 다양한 일을 해내야 했다. 예전 회사에서 ‘이 일을 왜 우리 팀이 해야 하느냐’며 떠밀던 경우를 생각하면 참 다르다. 나는 경험 디자이너란 메인 포지션 외에도 시장조사, 팀 내부용 워크시트 제작, 서비스 시각화, 제품 홍보, 소셜미디어 콘텐츠 제작, 크라우드펀딩 지원, 투자처 조사, 웹사이트 관리 등을 했다. 덕분에 다뤄본 적 없는 툴을 배우기도 하고 독학해서 깨우치기도 했다. 짧은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영역이 참 넓어졌달까. 모두가 각자의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고, 그래야만 했다. 

  

3. 민감한 포지션 구성

팀이 작다 보니 의외로 포지션에 민감해졌다. 내부적으로는 주도권의 문제가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업무가 있었는데, 나와 같은 스킬을 가진 친구가 이 팀에 나보다 먼저 합류했고 이미 그 업무를 담당해오고 있었다. 내가 그 업무를 주도하자니 빼앗는 기분이 들고, 그 친구가 하게 두고 나는 돕기만 하는 것도 편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그 친구와 원래 알던 사이라 부담 없이 일을 함께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팀에서 처음 만났다면 어땠을까. 나를 팀에 받아들인 이유가 '그 직무를 위한 일손이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여러 일을 두루 해낼 수 있는 일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서 더욱 애매했던 것 같다. 외부적으로는 팀 안에 어떤 포지션이 있는지가 서비스의 성격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예를 들면 디자이너가 많으면 디자인에 강하다는 걸 더 어필할 필요가 있었고, 개발자가 많으면 제품이 테크 쪽으로 탄탄해야 했다. 서비스의 성격에 맞지 않은 특정 포지션이 많으면 외부에서 볼 때 팀이 허술해 보일 수도 있었다. 


4. 팀의 단계에 따라 변하는 업무

내가 팀에 합류한 시점에 Vessel은 파일럿을 마치고 크라우드펀딩에 집중했다. 내가 하고 싶던 경험 디자인 업무는 파일럿 때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인데, 이미 업무에 맞는 시기는 지났기에 팀원들과 함께 투자지원금 모금에 집중했다. 팀원이 적다 보니 시기를 타는 업무를 할 때는 다 같이 그 업무에 매달려야 했다. 


5. 일에 대한 만족감

이 팀에 있는 동안 Google과 AIGA가 진행한 Design Census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내가 하는 일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사실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질문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던 것 같다.

-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는가

- 내가 있는 직장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는가

- 내가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 항목에 대해 100% 만족한다고 답할 수 있었고, 내가 있는 회사의 비전과 내 비전이 얼마나 일치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매일매일 해내는 일이 결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면 그 과정이 어렵더라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6. 팀원들과의 관심사 공유

팀원들은 모두 하나같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고, 인종이나 젠더 등의 인권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변화를 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점은 우리 팀을 프로젝트 외적으로 견고하게 했다. 업무 외에 각자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한국의 시국상황에 대해 들려주기도 하고 미국의 상황에 대한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파운더는 나를 떠오르는 정치삽화가로 소개할 정도로 내 정치 관련 일러스트레이션을 특히나 좋아했고 응원했다. 서로가 가진 열정에 대해 격려해주는 팀원들 덕에 항상 든든했다.

나는 지난 1월 21일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 Women's March를 맞아 Vessel의 메세지를 담은 스티커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아쉽지만 헤어지다


Vessel에 있는 동안 직무경험 외에도 참 많은 것을 얻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팀과 함께 일하는 건 역시 에너지가 넘쳤다. Sustainability을 주제로 하는 다른 팀들과 그 팀들을 지원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게 되었고, 그중에서 Vessel이 가진 강점이 무엇인지, 지금 이 시대에 아이디어를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지, 마케팅과 네트워크가 역시나 얼마나 중요한지도 배웠다. 크라우드펀딩 기간에 여러 도시에서 우리 아이디어를 반길 때는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쓰레기 만드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보니 미팅 때 일회용품을 볼 수가 없는 건 당연하고 도시락은 기본 아이템이다.


내가 이 팀에 들어가기 전에 기대했던 것들을 돌아보면 대부분의 항목에는 만족했지만 아쉽게도 '원하는 경력을 쌓는 것'을 수개월 내에 이루기 어렵다는 걸 느꼈다. 팀 내부적으로 그동안의 경험을 흡수하고 다음 도약을 준비해야 할 시기였는데, 내가 원하는 경험은 파일럿을 수행하는 것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금전적인 문제. 물가 비싼 뉴욕에서 무급으로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나 자신을 갉아먹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협의를 해보았으나 해결이 되지 않았고, 결국 팀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 팀원으로서 일을 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좋은 동료로 서로의 성장을 응원하고 있다.


돌아보면, 정해진 사무실에서 정해진 근무시간(보다 더 넘겨서)에 주어진 업무를 했던 경험뿐이었던 나에게 이 6개월은 충분히 도전적인 시간이었다. 근무시간, 근무장소, 시간관리, 업무의 유연성, 개인의 성장, 주도성, 비전, 팀웍, 개인적 가치, 열정페이까지 모두 이전 경험과 완전히 달라서 더 특별했다. 덕분에 좋아하는 일과 벌어먹고살만한 일과의 양립, 하고싶은 일과 비자를 얻기 위한 일과의 충돌을 절실히 깨닫기도 했다. 여기서 일하는 동안 비자 지원을 받을 만한 일자리도 찾았지만 결국 얻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이 팀에서 경험한 장점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장점이 보이지 않는 곳에 지원한다는 데 주저했던 것 같다. (아직 정신을 못차렸을 수도... 배가 불렀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정착은 망한 것 같지만;; 배움의 시간이었다 생각하고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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