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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은 Dec 12. 2016

전체를 본다는 것

피카소로부터

대학시절 공부했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다시 읽으면서, "아쉬움과 뿌듯함"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이 책 속에 실린 도판들이 있는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내 눈에 그려지는, 그러니까 한번 혹은 그 이상 다녀온 곳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 살짝 입꼬리를 올라가게 했다. 그래서 루브르에서 여느 관광객처럼 모나리자 발치에서 사진도 찍었고, 대영박물관에서 남의 나라 것 많이도 가져다 놓았다며 욕도 하고, 테이트 모던과 브리튼에서 몬드리안의 작품을 보며 교과서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집트 혁명이 일어난 그날 아침, 고고학 박물관도 다녀왔다.

지금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이 책을 들고 그곳들을 다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짙다.


사실 처음 유럽여행을 할 때, 봐도 별로 감흥이 없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는 시점이 있었다. 오르셰 미술관을 30분 만에 주파하는 순간... 난 작품을 볼 자격이 없는 사람같이 느껴졌고, 그 이후 그 여행에서 더 이상 미술관을 가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쉬운 우피치와 프라도를 놓쳤다.


이런 내 생각을 바꿔놓은 것이 런던에서의 생활이다.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사치갤러리,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 와핑 프로젝트, 코톨트 갤러리,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 그리고 가고시안 갤러리까지. 대부분의 전시가 무료이다 보니 시간 시간 보내기도 좋고, 친구들과 여러 번 가기도 좋았던 것 같다. 특히 주변에 예술사를 전공한 친구들이 많아 가끔 그녀들의 설명이 곁들여지면,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중에서도 가고시안 갤러리의 <피카소 展>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일본 친구 아키코의 권유로 추적추적 비 오는 날, 교과서에 실린 입체주의만 생각하며 별로 기대 없이 간 전시회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큐레이터인 아키코가 가고시안 갤러리의 명성을 설명하고 이런 전시회는 흔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을 해줄 때만 해도 내가 피카소에게 감동받을 줄은 몰랐다. 피카소의 일대기, 소묘부터 세라믹까지 모든 것을 총망라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시였다. 입체주의만 떠올렸던 나에게는 일종의 문화 쇼크였다. 그는 그냥 천재구나. 아키코의 설명에 의하면 그의 정밀화는 최고 수준이며, 더 이상의 재미를 느끼지 못해 입체주의 그림이 탄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피카소의 초기 색감은 내가 가장 사랑해마지않는 초록이었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정말 성공해서 피카소 작품을 하나 소장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생겼다(성공하면 다 피카소 공입니다).


갑자기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피카소가 되어버린 후,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피카소 소묘전>을 방문했다. 정말 이럴 수가... 이 전시만 보는 사람들은 피카소를 얼마나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혹은 오해하게 될까?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빈약한 전시였다.


이렇게 우리는 아는 것만큼 보게 되고, 경험한 만큼 판단하게 된다. 내가 교과서의 피카소만을 알았을 때와 피카소의 일생을 담은 훌륭한 전시회를 보고 난 다음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카소 소묘전>에서의 실망은 피카소를 향한 것이 아니라 큐레이터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오해하지 않았다.


나는 우연한 계기로 피카소를 이해할 기회를 얻었지만, 내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갑자기 오싹해진다. 내 눈에 비친 한 순간만을 보고 그 사람의 기회를 박탈하거나, 불이익을 주고 혹은 관계마저 끊어버린 것을 아닐까? 혹은 세 치 혀로 상대를 기만하지는 않았을까? context의 시대에 text만을 취한 것은 아닐까?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오해하게 했는지 그래서 나는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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