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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만소리 Feb 27. 2020

라오스에 나와쓰!

튜브 타러 왔는데 저도 제가 왜 메콩강에 오지 마을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존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길쭉한 나무 통통배가 탈탈탈- 엔진 소리를 내며 선착장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 위로 한가득 짐을 바리바리 싼 라오스 아줌마와 아저씨들이 무료한 기다림을 끝내고 하나둘씩 배 가까이에 서기 시작했다. 직감적으로 우리가 기다린 배라는 걸 알아챘다. 배 안에는 루앙프라방 시내에서 공수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보자기에 폭 쌓인 갓난아이도 엄마의 품에 안겨있었다. 라오스 주민들은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조금씩 엉덩이를 밀며 자리를 내주었다.


배낭 여행자 넷은 무거운 배낭과 함께 꾸역꾸역 나무판자 위에 엉덩이를 댔다. 메콩강의 흙빛 강물이 달릴 때마다 배 안으로 튀겨 들어왔다. 바닥은 물론 지나가는 물고기도 보이지 않는 탁한 메콩강 강물에 손을 담갔다. 진흙의 꺼끌함이 손 끝에 잔해처럼 남았다.


원래 목적지 배를 기다리던 선착장, 여기서 제이콥의 한 마디로 티켓을 찢었다.



 어제만 해도 루앙프라방에서 여유롭게 망고 주스를 먹었는데, 오늘의 나는 구글 지도도 찾을 수 없는 마을을 가기 위해 메콩강 상류 위를 달리고 있었다. 지금 우리의 목적지는 전기도 인터넷도 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라오스 북쪽 오지 마을이다. 들어가는 배만 있고 나오는 배도 없단다. 숙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착장에서 주워들은 마을 이름 하나 가지고 원래 목적지 티켓을 찢고 이 배에 올랐다.


제대로 된 곳에서 잠은 잘 수 있을까? 밥은 어디서 먹지? 혹시라도 구조 요청을 해야 되는 상황이 오면 어쩌지. 전기도 없는 곳이니 당연히 전화도 안 터질 텐데!



마을과 마을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주민의 나무배, 안 태워주면 못 나감



   성급한 결정일까? 그런데 왜 마음은 터질 것 같지. 앞 뒤 생각할 겨를 없이 저지른 충동이 나를 흔들고 있었다. 그저 메콩강 위를 달리고 있을 뿐이었는데,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았다. 몇 년도에 생산되었는지 가늠도 안 되는 오래된 엔진 소리에 맞춰 통통 튀는 나무배는 메콩강 상류를 거침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 많던 짐들과 라오스 주민들이 모두 차례대로 내리고 배낭 여행자 넷만 남아 더 작은 배로 갈아탔다. 20분을 더 달렸을까. 라오스 메콩강 북쪽 상류에 위치한 '쏩잼' 마을에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마을이 나의 여행 인생의 방향을 틀어쥘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라오스에 나와쓰! 1화 글/키만소리
"이 모든 것은 다 토니 때문이야."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던 남편과 나는 루앙프라방의 호객 기사 옆에 앉아있었다. 기사들이 주로 앉아있는 곳이 대게 시원한 곳이기도 했고, 공짜 라오어도 배울 수 있었다. 끊임없이 폭포에 싸게 데려다준다고 꼬시는 기사에게 "라오스 말로 배고프다고 어떻게 말해?", "깎아달라고는 어떻게 말해?"라며 공짜 라오스어 강의를 졸랐다. 끈질기게 구애를 하던 기사는 관광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는 이상한 관광객들에게 결국 휘둘려 라오스 말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0(쑨) 1(능) 2(썽) 3(쌈) 4(씨) 5(하)...  커 롯 다이 버어 (깎아줘)


기사한테 배운 말로 기사한테 깎아달라고 하기. 그러면 대부분 어이없어서 깎아준다.


   한참을 나무 그늘 밑에서 놀고 있었는데,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지나갔다. 그중에 토니가 있었다. 토니는 타이거 JK와 비슷한 머리와 목소리를 가진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약간은 어눌한 한국말, 늘어진 나시티 사이로 언뜻 보이는 타투들, 슬리퍼를 끌고 다니며 처음 보는 외국인과도 거리낌 없이 대화하는 편안함이 여행 고수의 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역시나 토니는 오늘의 할 일도 내일의 계획도 앞으로의 일정도 없는 장기 여행자였다.


 휴학한 대학생, 병가를 내고 쉬러 온 직장인, 토니 그리고 세계 여행자 부부인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방비엥에 가서 튜브를 타거나, 태국으로 돌아가거나, 베트남으로 넘어가거나 대충 비슷비슷하고 지루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토니는 달랐다. 밥을 먹을 땐 루앙프라방에 얼마나 있을지,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고 말해두고선, 후식으로 망고 주스를 먹을 땐 갑자기 중고 오토바이를 한 대를 사서 라오스부터 베트남까지 일주를 할 거란다.


갑자기 중고 오토바이가 왜 나와?


 갑자기? 이렇게? 계획 없이 즉흥 여행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던 우리는 토니의 여행력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오토바이를 중고로 사고팔아버리겠다는 생각도 놀랐고, 라오스의 진가는 도로가 뚫리지 않는 곳이라는 허세도, 예전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친구랑 해봤는데 이번에는 혼자도 해보고 싶어 졌다는 말도 멋있었다. 계획 없이 그저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면서 광란의 파티나 하는 한량인 줄 알았는데. 까 보니 토니는 존나 멋있는 여행자였던 것이다.



 계획이 없다는 건 반대로 마음대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남들처럼 여행하기는 싫다고 떠들어대면서 아무것도 안 했다. 순전히 우연에 얻어걸리는 여행을 하면서 우쭐대던 나는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지난 3개월의 여행이 지루하고 무료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얕은 만족감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토니의 즉흥 여행 파트너가 되기로 했다. 가평 같았던 루앙프라방은 토니를 만나 이태원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정신 차려보니 일본, 아일랜드, 호주, 미국, 한국 국적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토니는 늘 이런 식이었다. "밥 먹으러 나오다 혼자 있길래 같이 왔어" 혹은 "아까 지나가다가 만난 애들인데 여기로 온대." 그러다 술에 취해서 "우리 내일 차 빌려서 메콩강 마을에 가자." 같은 흐름이었다.



루앙프라방 터미널에서 메콩강 선착장까지 우리를 데려다 줄 노 에어컨 고물 버스


라오스 북쪽으로 올라가자!라고 말하기 시작한 때가 밤 12시가 넘었을 때니까. 나는 솔직히 내일 하루 쉬고 다음 날 갈 줄 알았다. 본인은 미국 사람이라지만 토니의 신속 정확함을 보고 있으면 뼛속까지 한국 사람이 틀림없었다.


 정확히 7시간 후 우리는 미니 밴에 몸을 싣고 버스 터미널로 향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토니를 만나고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계속)


 



키만과 효밥. 2년간 부부 세계 여행 기록을 <여보야, 배낭 단디 메라> 웹툰으로 옮기다가 작가가 너무 게으른 탓에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림보다 글이 빠를 것 같아서 여행 하이라이트를 뽑아 연재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 여행 이야기는 라오스 메콩강 북쪽 오지 마을에서 일어난 <라오스에 나와쓰!>다.  

 


키만소리 (김한솔이)

2년간 남편과 세계 여행을 하다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출판 스튜디오 <쓰는 하루>를 만들었다.

여행자에서 이제는 작가와 글방 에디터, 출판사 대표를 맡고 있다.

제3회 브런치 출간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엄마야, 배낭 단디 메라」를 출간했다.

세계 여행하면서 받은 엄마의 메일을 엮어 「55년생 우리 엄마 현자씨」를 출간했다.

다수의 작품을 그리고 쓰며 활발히 연재 중이다.

인스타그램 @ki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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