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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을기억해 Oct 07. 2022

그날 갔던 바가 처음이었다고 하면 믿으실 건가요?

네, 그날은 영화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자그마한 극장을 빌려 함께 영화를 감상하고, 식사 자리로 옮겨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그런 날이었어요. 저로서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모두와 함께 보게 된 것이 조금 기뻤습니다. 영화가 영화다보니 각 인물에 대한 해석과 다양한 시선, 저마다 인상 깊었던 장면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도 좋았지요. 보통 이런 걸 두고 티키타카가 잘 된다고 표현을 하죠?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질 만큼 그날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였습니다. 모임 중 어느 분이 자신이 좋아하는 바가 근처에 있다며 소개해주신 것도 아마 그날의 모임이 만족스러웠던 연장선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모임에 온 누군가에게 흥미가 생긴 그분이 그곳으로 우리들을 이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면서요.


일행들에게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저에게는 처음 가는 바의 풍경이었어요. 어쩌면 믿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그게 말이죠. 저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바에 갈 일이 도통 없었거든요. 심지어 어릴 때는 술자리조차 싫어했었는데요.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는 언제든 정갈한 채로 저 자신을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술로 저의 정신이 무장해제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지요. 누가 보든 안보든 간에 흐트러진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언제나 분명하게 깨어있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저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술자리에 가야만 하는 날이면 정신을 유지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바짝 날을 세우며 지낸 덕분인지, 유전자의 축복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흐트러진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고 살 수 있었어요. 대학생 때 딱 한 번, 복받치는 설움에 술자리에서 펑펑 눈물을 흘렸던 날을 빼면요.


아무튼 그날 들어간 바의 모습은 꽤나 근사했습니다. 차갑고 묵직한 콘크리트 건물들만 가득한 줄 알았던 곳이, 문 하나 차이로 이렇게나 분위기가 달라지다니. 지브리 애니메이션에나 등장할 것 같은 아늑한 공간이 갑자기 눈앞에 딱! 하고 나타났다면 믿으실 수 있겠어요? 자리마다 은은하게 비치는 조명이며, 이따금씩 존재감을 과시하듯 귓속을 파고드는 재즈 음악이 저는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같이 간 일행 중 한 분이 자기가 먹고 싶은 맛에 대해 묘사하며 그런 맛이 나는 술이 있는지 묻자, 정말로 그것과 비슷한 느낌의 술을 만들어준 바텐더님도 신기했어요. '도심 속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바만큼이나 바텐더님도 만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던 거죠. 그가 언뜻 무심한 듯 보이면서도 '하지만 내 손님에겐 따뜻하지'라는 느낌으로 드문드문 건네는 친절함도 보기 좋았습니다. 저요? 저는 위스키 하이볼을 시켰지요.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일행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조금씩 들이키는 한 모금이 참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가 끝이 난 건 새벽 세시 반이 조금 넘어서였을 거예요. 제가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기억하는 건 세시쯤 무렵에 갑자기 쏟아지듯 비가 내렸던 장면 때문이에요. 한참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가, 그 꽃이 저물어간다고 모두가 생각할 즈음 갑작스레 후두둑하고 떨어지는 비를 만났던 거죠. 제게는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비 내리는 창 모습이 그려질 정도랄까요. 장대비라고 하죠? 그 비에 맞서면서 바를 떠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기세 좋게 내리던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질 때까지 우리는 비에 얽힌 에피소드도 꺼내보고, 때로는 빗소리를 듣는 것에 마냥 취해있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다시 비가 내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좋았던 시간을 뒤로하고, 각자의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의 기억이 이토록 근사하기도 하면서 제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웠던 건 그 바에 간 날이 주변 사람들에게 술을 아예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는 점이에요. 무언가에 홀린 듯 며칠 뒤 혼자서 두 번째 방문을 했던 것도 그렇고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해놓고는 홀로 바에 들어선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두 번째로 방문한 날, 저는 아무도 저를 알지 못하는 익명의 존재가 된 자신을 과하게 의식하고 있었어요. 그 자유로움 속에 바를 찾은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슬쩍슬쩍 엿들으며 위스키 하이볼을 마셨더랬습니다. 위스키 하이볼을 마시면 그날의 마법 같았던 순간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요. 그렇게 홀로 생각나는 이야기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수첩에 끄적였던 이 그 바에서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지금 떠올려보면 두 번째 방문은 사실 그 공간보다는 그날의 그 순간들이 그리웠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 애틋함에 언젠가는 제가 이렇게 글로 쓸 줄 알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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