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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을기억해 Nov 10. 2022

10.29 희생자를 추모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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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너무 아픈 한 주였다. 출근하는 날, 그의 책상 앞에 국화가 놓여있는 것을 마주하기 전까지 나는 그가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금요일까지 서로 인사하며 한 공간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를 이제 더는 볼 수 없다고?..누군가가 죽는 일에 경중을 따질 수 있겠냐만은 마음속으로 떠나갈 날을 예감하던 이의 죽음보다 이토록 갑작스레 떠나가는 이의 죽음이 더 애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출근해서 맞이한 사무실의 공기는 너무도 무거웠다. 모두가 출근을 마쳤을 때쯤 물기 어린 목소리로 다독이는 연구소장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모든 동료들이 흐느끼며 울었다. 이 상황은 그야말로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10.29 참사로 세상을 떠난 동료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후가 되자마자 연구소의 모든 인원이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내가 가본 장례식장 중 가장 마음 아픈 곳이었다. 밝게 웃고 있는 그의 영정사진이 우리 회사에 입사 지원했던 사진이라는 점도 더욱 마음 아프게 했다. 죽은 이가 젊었으므로, 조문객 역시 젊었고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온통 비통함과 애도와 슬픔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팀을 나누어 차례로 조문을 진행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왠지 유가족들을 볼 낯이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더더욱 전할 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전할 수 있을까. 내 안에서 그들의 슬픔을 덜어줄 말을 찾기 어려웠다. 자식을 잃은 부모, 동생을 잃은 언니, 오빠의 마음을 어찌 헤아린단 말인가. 조문객들이 서럽고 슬프게 울 때마다 유가족들은 눈물 버튼이 눌린 것처럼 울음을 마구 쏟아냈다. 어떨 때는 너무 지친 나머지 넋이 나가 있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너무도 슬픈 광경이었다.

장례식장으로 출발하기 전, 조문 행렬을 도울 사람이 필요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조문하는 것만으로는 그를 제대로 떠나보낼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그렇게 친한 동료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마음의 빚으로 작용했다. 그가 인턴일 때 코딩을 가르치며 그를 우리 회사의 신입사원이 되도록 이끈 전적이 있기도 했거니와 그는 내 절친의 부사수이기도 했던 까닭이다. 이제 다시는 그와 가까워질 기회가 없다는 것, 더 이상 그의 일상을 마주할 수 없다는데서 오는 부채감은 상당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그를 보내주는 방식으로 장례식장에서 조문 행렬을 거드는 일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조문 행렬을 돕는 과정에서 나는 동료들의 상처 또한 얼마나 깊은지를 알게 되었다. 평소 단단하게 자신의 삶을 이어가던 연구소장님도 그날만큼은 무너져 내린 마음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회사에서 보내는 근무시간은 하루 중에서도 비중이 제법 크고, 가족들만큼이나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와 친했던 사람들, 그를 가까이 두었던 이들, 그의 사수와 상사는 '만약에 내가 ... 했다면' 같은 가정을 떠올리면서 그가 토요일날 참사의 현장으로 가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앞다투어 꺼냈다. 따로 장례식장에 조문 왔다가 우리의 슬픔을 목도한 다른 부서 동료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위로해주었다. 다른 부서의 동료들에겐 우리가 그런 가정들을 말하는 것 자체가 각자 그를 잃어버린 슬픔의 크기를 보여주고 있는 느낌이었을 거다. 나중에 연구소장님을 통해 들으니 우리 회사에서만 100여 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고 했다.

절친인 J 역시 충격이 커 보였다. 그가 인턴을 거쳐 정식으로 입사한 때와 비슷한 즈음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 J는 집에선 아들을 키우고 회사에선 딸을 키우고 있다며 부사수의 성장을 늘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었다. 서로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그들의 모습은 내가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사수와 부사수의 모습이기도 했다. 회사에서도 평소 분위기 메이커 역할로 사랑받고 있는 J였으므로, 사수로서 부사수와 나눈 친밀함 또한 각별할 터였다. 사정이 그러하니 J가 그에게 가졌을 애정과 추억의 크기만큼 더 슬프고 절절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특히 정신적으로 유대가 깊었던 두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그 슬픔의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나이 들어서 그런지 눈물이 많아진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동시에 가족들을 통해 자신이 그에게 좋은 사수였다는 사실을 안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도 했다. 그에게 잘해주지 못한 사수로 기억되었다면 두고두고 더 마음이 쓰였을 것이라면서. J는 발인 과정까지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것으로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유가족들과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평소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울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울컥하는 마음과 함께 눈물이 차오르는 일은 시시때때로 발생했다. 이번 일로 내게 언제든 눈물이 흘러나올 준비가 되어있는 수도꼭지가 하나 생긴 것만 같다. 이제 10.29 참사와 관련된 키워드나 그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들을 만났을 때 평소와 달리 내 감정의 진폭이 커지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든 눈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그저 주변인일 뿐인 내가 이럴진대, 그와 가까웠던 이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훔치겠는가. 그의 유가족이나 가까웠던 이들은 나보다 더 자주 그런 순간들을 마주할 것이고, 그때마다 눈물이 마를 새 없이 흘러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이번 참사는 우리 모두의 영혼에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새겼다.

떠나간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이태원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거기서 꺼져간 생명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추모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이태원으로 달려갔다. 지하철을 타고 추모의 장소에 도달하기 전까지 괜찮을 거라고 속으로 스무 번쯤 되뇌었던 것 같다. 너무 놀라지 않겠다고, 담담하고 씩씩하게 그들을 위로하고 올 것이라고 다짐했건만 그곳에 쌓인 메시지들 앞에서 나는 다시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많은 국화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쪽지들이 거기에 있었다.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의 빚을 느끼는 어른들이 남긴 이야기부터 참사의 현장에 있었으나 살아있는 이들이 느끼는 부채감이 담긴 메시지, 이미 다른 일로 누군가를 잃어본 이의 위로 메시지, 희생된 이들과 동년배인 청년들이 남긴 절절한 메시지들이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을 빽빽히 채웠다. 현장을 지키는 경찰들 너머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목탁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탁 소리가 왜인지 모르게 너무도 위안이 되었다. 그곳을 찾아주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고마웠다. 많은 이들이 희생자들을 위해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천천히 쪽지들을 읽어보며 희생자들을 애도했다. 그들이 부디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10.29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애도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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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뉴스레터 더 밀크(The Miilk)에서 인용한 시입니다.
추모 공간 어딘가에 누가 남긴 시라고 합니다..

<무거웠을텐데>
이태원의 나비들에게
날개마저 무거웠을텐데

바람에도 쉬이 휩쓸리는 일상은
이따금 돌처럼 무거웠을텐데

하루 벌어먹는 고단함과
또 하루 견뎌내는 막막함의 무게는
그 가느다란 다리로
너끈히 지탱하기 힘겨웠을텐데

왁자한 추억들은 낡아 바랬고
내일을 살아낼 웃음은 고파
너는 반짝이는 밤거리를 헤맸을텐데

무거운 것들은 버려두고
날개마저 벗어버린 그 날 밤

죽음이 쏟아진 비탈길에서
그래서 너는 날지 못했나
아니 영영 날아가고 말았나

꽃이 피었다면 사뿐히 돌아올까
늙은 어미의 손에는 국화 한 송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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