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은 모릅니다. 알고 있었다고 믿었는데 모르고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어요. [1] 그런데 모르고 있다고 믿었는데 실은 알고 있는 것도 있거든요. 이 영역이 제가 글을 쓰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후루이 요시키치
“저 사람처럼 글을 잘 쓰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제법 많겠지만, 그것을 처음으로 욕망했던 때를 기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질문을 떠올리기 전까지는 그런 기억이 남아있다는 자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처음 ‘나의 현재에 영향을 준 크고 작은 사건이나 인연’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나 자신의 역사를 발굴(?)해내고야 말겠다는 의기양양함으로 의지를 불태웠다. 이번 글을 기회삼아 소소하지만 내 인생을 바꾼 지점들을 찾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고고학자의 마음이 되어 과거를 살펴봤을 땐 “내가 바로 그런 기억이야”하고 손짓하는 기억보다는 희미하고 뭉툭하게 닳아버린 기억들이 더 많았다. 그런데 그러다 갑작스레 툭하고 튀어나온 한 순간을 발견해 낸 것이다. 내가 ‘저 사람처럼 글을 잘 쓰고 싶다’고 생각한 첫 순간을 말이다. 그렇게 기억의 실타래를 당기자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H가 남긴 사진과 글, 거기에 신중히 선곡된 음악까지.. 그리고 그것을 모니터 너머로 보며 전율했던 그 순간의 나.
이렇게 보면 기억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는 그런 기억이 있는지조차 자각이 없다. 기억들은 이처럼 대부분 표면에 켜켜이 먼지가 쌓여가며 그런 게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침잠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의식의 수면 위로 불쑥 올라오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먼지를 툭툭 털고는 선명하게 손에 잡힐 듯 기억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바로 오늘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H와의 첫 만남은 2005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건축을 전공하는 대학생인 동시에 취미 사진가였다. 고등학교 때 사진을 접하게 된 이후로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던 때다. 2005년은 첫 DSLR 카메라를 구입했던 시기이기도 한데 내가 이것을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바로 H의 글 때문이다. 그건 당시 카메라 구입과 H와의 인연이 서로 얽혀있는 까닭이다.
그때는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 못했기도 하거니와 인생 처음으로 구입하는 전문가용 카메라인 만큼 아무거나 구입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블로그를 살피거나 유튜브를 찾아보거나 하면 전문 리뷰어들이 올린 글들을 산더미처럼 찾아낼 수 있는 시대지만, 당시는 전문적인 정보를 얻으려면 거기에 맞는 사이트를 찾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간 SLR클럽(https://www.slrclub.com)이라는 커뮤니티는 무려 100만 명의 가입자가 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울 만큼 전문가용 카메라를 다루는 어른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바로 거기에 H가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단순히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 정도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애정이 많고, 지독하리만치 꼼꼼하게 자신의 물건을 관리하는 관리벽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촌철살인의 문장을 쓸 줄 아는 카피라이터이기도 했다.
H를 처음 알게 된 글을 기억한다. 니콘의 필름 카메라 F5에 대한 글이었다.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니콘이지만 필름 카메라 시절만 해도 캐논과 함께 시장을 양분하며 위세를 굳건히 했던 카메라 브랜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필름 카메라를 만드는 장인들의 철학과 고민이 녹아있었다. F5는 그 니콘의 장인들이 만들어냈던 다섯 번째 플래그십 카메라였고, 왜 니콘이라는 브랜드에 사람들이 열광하게 되는지를 말해주는 기기이기도 했다. H는 그것을 광고쟁이의 언어로 말하기보다는 자신이 그 브랜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담담히 고백하듯 글을 털어놓았다. 읽는 내내 놀라웠다. 누구든 글을 읽은 이라면 그 이유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호소력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란 이런 건가 싶었다. 그 글은 결국 내가 니콘 DSLR을 구입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커뮤니티에 이따금씩 나타나는 그의 글들을 거듭해 읽을수록 나는 그가 미치도록 궁금해졌다. H는 대체 얼마나 박학다식한 것인가. 어쩌면 이렇게 글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가. 이런 감성들을 이토록 섬세하게 표현해내다니, 그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까?
그러다 우연히 커뮤니티에 공개된 그의 프로필에서 공개되어 있는 홈페이지 주소를 찾았다. H가 만든 개인 홈페이지였다. 거기서 그가 카피라이터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어디 그뿐이랴. 홈페이지에는 커뮤니티에 공개되지 않은 각양각색이 글들이 있었다. 지나간 옛사랑 이야기, 이제 막 자라고 있는 딸에게 들려주는 말, 차(茶)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사랑하는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 자전거를 타고 여행한 이야기까지. 어떨 때는 한 줄 남짓한 문장과 사진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때도 있었다. 단 한 문장이 가지는 그 묵직한 무게감이라니. 그야말로 제대로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2] 또 그가 쓰는 글에는 항상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이 함께 선곡되어 있었다. 광고를 업으로 하니 분위기에 걸맞는 음악을 많이 알았을 것이고, 그가 가진 취미 중 하나인 고가의 오디오 장비로 음악을 들으면서 다듬어진 음악 취향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한 마디로 그는 내 이상향이었다. 그렇게 나는 점점 그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H는 내가 닮고 싶다고 생각한 첫 번째 어른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나는 동경했던 H의 나이에 가까워졌다. 결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나는 결국 문장을 짓는 사람이 되었다. 낮에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된 문장을 짓고, 밤에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의 문장을 짓는다. 그리고 내가 쓰고 싶은 글 어딘가에 H의 영향력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음을 이제는 안다. 나도 그처럼 누군가에게 닮고 싶은 글쓴이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내 나이에 어울리는 어른이 되었을까? 살랑이는 봄바람, 하염없이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나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곱씹은 끝에 사실은 아무렴 어떤가 싶어졌다. 그래, 아무렴 어떤가. 나는 내가 나인 것에 만족하는 걸.
[1] 이번 글을 쓰면서 모르고 있다가 쓴다는 게 무엇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어 공감 갔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였다.
[2] 당시는 음악에 대한 저작권이란 개념이 약했고,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홈페이지에 음악을 아무거나 선곡하는 것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