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책에 대한 재미를 부쩍 느끼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뒤적거릴 때가 많아졌다. 색이 바랜 속지를 들여다보면 새삼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고, 첫 장을 넘겼을 때 구입 년 월일과 간단한 메모가 쓰여 있어 언제 읽었으며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지 발견하는 것은 지친 일상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일이었다. 간혹 선물 받은 책에서 떨어지는 연서(戀書)를 발견하면 그 재미는 한층 배가 된다. 돋아나는 봄의 새순처럼 풋풋했던 감정의 사선들이 어찌 청춘이 아니라 하겠는가.
혹 남편이 볼 새라 책 깊은 곳으로 찔러 넣고, 몇 년 뒤에도 이 쪽지를 우연히 발견하여 지금처럼 미묘한 떨림을 만끽하리라 생각하며 책장을 덮었다. 이런 책 훑어보기 작업 중에 우연히 옛일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젊은 날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란 책을 탐독했다. 지금 봐도 생소한 어휘들을 줄까지 그어가며 읽은 흔적을 보니, 내 청춘의 고민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느꼈다. 책을 덮으려는 순간 책갈피 사이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돌아가신 아버지 사진이었다. 선산을 벌초하고 무덤가에 앉아 한 곳을 응시한 채 쓸쓸히 담배를 피워 문 사진이었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늘 가슴 깊이 남아 있는 나였기에 돌아가신 지 이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의 사진을 보면 가슴 한 모퉁이가 쏴아 해지며 코끝이 찡해온다. 여지없이 눈물이 핑 도는데 문득 사진의 찍힌 날짜를 보니 내가 대학 1학년 때였다. 순간 그때 아버지와 나만 아는 사건(?)이 생각났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말할 수 없는 비밀’ 이 된 일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버지 다이어리가 눈에 띄어 호기심에 뒤적거려 보다가 갈피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회사 야유회 때 찍은 사진인 듯한데 한 여자가 유독 친근한 몸짓으로 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나의 육감이 작동하는 순간이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리려 했다. 그러나 직업 군인으로 오랜 시간 가족과 떨어져 객지 생활을 해 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부싸움 원인은 아버지의 여자문제였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 그 사진의 잔상이 오랜 시간 머물려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주말 아침으로 기억한다. 아침에 전화벨이 울리길래 나는 내 방에서 아버지는 안방에서 동시에 수화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받으신 걸 알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상대편에서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든 채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이미 의심의 끈을 쥐고 있던 터라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많이 당황해하셨고 대충 얼버무리면서 전화를 끊으셨던 것 같다.
가슴이 쿵쾅거리면서 심하게 흥분한 나는 옷도 대충 챙겨 입고 집을 나와 버렸다. 거리를 배회하다 내린 마음의 결론은 귀가해서 아버지께 장문의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늦은 밤 내 방에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들어가서 노트에다 두 장 가까이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서운한 마음과 아버지의 이성에 크게 호소했던 것 같다. 고생하신 어머니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 자식들도 다 장성하지 않았느냐. 가족의 자리로 빨리 돌아오시라.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많이 의지하고 사랑한다는 등등. 그 사연이야말로 구구절절했을 것이다.
다음 날 아버지는 1박 2일 지방출장을 갈 예정이셨다. 아침 일찍 나가시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어머니 몰래 아버지의 양복 안 쪽 주머니에 편지를 넣으며 “차 안에서 보세요.” 하며 웃어 보였다. 좀 놀란 기색으로 양복주머니를 만지작대시며 아버지는 문밖을 나가셨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아버지는 많이 달라지셨다. 귀가시간도 빨라지시고 어머니와 주말에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자주 다니셨다. 예전부터 타인들이 보기에 사이좋은 부부 셨기에 아버지의 이런 변화는 나만 감지하는 미세한울림이었을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동안 딸의 얼굴을 애써 피하는 듯 보였고 아버지의 등을 쳐다보는 나는 왜소해진 아버지의 작은 쓸쓸함마저 느껴야 했다. (물론 그 편지에 대해선 아버지와 나는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미국의 대표적 작가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 글씨]는 17세기 중엽 청교도 식민지 미국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사건을 다룬 이야기이다. 헤스터 프린이라는 젊은 여인은 나이 든 의사 칠링워스와 결혼했지만 미국에 먼저 들어와 살다가 펄이라는 사생아를 낳게 된다. 청교도 사회에서 간통한 벌로 가슴에 'A'(adultery) 자를 달고 살아가나펄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상대는 마을의 목사 딤즈데일이지만 그도 양심의 가책은 느끼면서도 헤스터를 외면한 위선적인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칠링워스는 그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주게 되고 결국 딤즈테일은 죄책감으로 점점 쇠약해져 간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딤즈테일은 자신의 죄를 많은 사람들앞에서 고백하고 헤스터와 펄에게 자신의 가슴에 깊게 새겨진 ‘A’를 보여주며 죽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의 성역’ (sanctity of the human heart)이란 말이 와닿았다. 주인공 헤스터와 딤스테일 목사보다 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타인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한 칠링워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롭고 곧은 삶만 고집해 왔던 철부지 딸은 아버지의 로맨스도 이해 못 하는 마음의 침범자가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조용한 마음의 성역을 무너뜨린 그날의 일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살면서 이런 감정의 폭풍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처럼 아니면 숙명처럼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당하지 않고 한때 앓고 지나는 수두처럼 조용히 마음 삭이는 인연, 물론 잊지 못할 흉터는 남을 것이다. 아버지도 마음 한 켠이 늘 외로우셨을까?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사진 속 아버지의 시선이 유독 내 마음을 저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