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일이 지났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지난 월요일에 개강을 했으니 이제 본격적인 유학생 생활을 10일 정도 한 셈이다. (지난 포스팅부터 자꾸 숫자를 맞추어 쓰는 것이 어딘가 좀 강박적인 것 같지만 아무튼)
내가 다니는 학교는 Hyper Island로, 졸업하면 학위가 나오는 전통적인 교육 기관은 아니다. 이 학교도 석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직업학교 - vocational school- 의 개념에 더 가깝다. 1996년에 스웨덴 칼스크로나에서 처음 시작해서 지금은 브라질, 싱가포르, 영국, 미국, 스위스 등 다른 나라로도 캠퍼스를 확장하고 있다. 내가 다니고 있는 Full-time 코스 외에도 MA 학위 코스, 온라인/원격 수업, 원 데이 코스 등 다양한 형태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교육 주제는 Design, Tech, Business의 큰 틀 안에서 UX, 모션 디자인, 프런트엔드 개발, 데이터 분석 등 여러 분야를 커버하는데 나는 이걸 '졸업하면 광고 에이전시에 바로 취직할 수 있는 인력'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보통의 대학이 정해진 전공에 따라 연구와 교육이 이뤄지고 그 전공의 종류가 쉽게 변하지 않는 것과 달리, 이 학교는 매년 프로그램의 종류와 내용이 업데이트된다. 실제 산업에서 원하는 역량이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이미 Hyper Island를 졸업한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있으니 학교 설명은 이 정도만 해도 될 것 같고, 그래서 내가 듣는 코스는 *Content Developer*이다. 2018년에 처음 열린 이 코스는 마케팅 차원에서의 콘텐츠 기획, 제작 등을 다룬다.
Hyper Island는 개강 후 첫 3주를 Foundation Week이라고 부르는데, 1주 차를 Way Week, 2주 차를 Innovation Week, 3주 차를 Vision Week이라고 부르더라. 첫째 주에는 Hyper Island의 'Way'를 익힌다. 졸업하기 전까지 프로그램 전반에 거쳐서 계속 반복하게 될 팀 빌딩, 프로젝트 회고하는 방법 같은 것을 아주 가쁜 일정으로 배우고, 연습한다.
연습에 방점을 찍는 이유는 그게 이 학교의 교육 방식인 'Learn-by-doing'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하이퍼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생들이 하이퍼에 오기 전에 직업을 가지고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뭔가를 연습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좀 생경해한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지난주에는 400명이 넘는 학생을 랜덤 하게 4-5명씩 조를 짜서, 하나의 클라이언트와 브리프를 두고 2-3일 내에 솔루션을 생각해내서 영상으로 피칭하는 해커톤 스타일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실존하는 클라이언트와 브리프가 있다 보니 많은 학생들이 완벽한 솔루션을 위해 짧은 일정이나, 클라이언트로부터 받은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 등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담은 질문을 할 때마다 퍼실리테이터의 답변은 늘 비슷했다. 이건 '연습'이니까. 배운 툴과 방법론을 팀과 함께 '연습'하는데 중점을 두라고.
솔직히 학교 생활 외에, 스웨덴에서 살기 위한 이런저런 일들을 해내다 보면 지금 나의 처지를 인식하게 되어서 황당한 마음이 드는 때가 많았다. 일하는 10년 동안 그렇게 많이 벌지도 못했는데, 수입도 없이, 대신 버텨 줄 배우자도 없이, 사놓은 집도 차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잔고를 파먹으면서 살겠다는 마음으로 혈혈단신 내돈내산 유학을 하는 나 스스로의 무모함에.. 너무 이상적인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는데- 이런 자잘한 깨달음을 얻으며 학교 3주 차에 접어들고 보니, 이러려고 왔구나 싶어서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대신 잘 기록해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