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다
지난달에 런던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학기가 끝나자마자 어떻게든 어디로든 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마지막 과제를 준비하다가 얼떨결에 티켓과 숙소를 후다닥 예약해서 떠났다. 런던은 이번이 세 번째였는데 이번에는 또 새롭고, 이 도시는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찼구나, 하는 마음으로 혼자 벅차 하며 길을 걸었다. 아마 이번에 유독 즐거웠던 건 초여름의 런던을 본 탓도 있을 것이다. 런던에는 매번 쌀쌀하고 춥고.. 건물 색과 하늘색이 구분이 가지 않는 갸울 즈음에 왔었기 때문이다.
대학생 시절을 떠올려 보면, 유럽에서 온 자유로운 영혼의 교환학생들은 날씨가 좋으면 좋아서 날씨가 안 좋으면 안 좋아서 수업에 빠지곤 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로 교수님이 ‘니들 왜 지난주에 다 같이 안 왔니' 물어보시는데 ‘날씨가 좋아서요'라고 대답했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들) 특히 금발 벽안의 교환학생 친구들은 해가 좋은 날이면 우리 학교의 가장 유명한 건물, 널따란 돌계단이 있는 그곳에 웃통을 까고.. 누워 있곤 했다. (진짜 이것도 진짜다)
반면 나(와 나의 친구들)에게는 날씨가 수업을 가냐 마냐를 결정하는 요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차라리 전날 술을 많이 마셔 아침에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라면 모를까.. 그냥 약속을 잡을 때도 그렇다. 비가 오면 다니기에 좀 번거롭기는 하지만 실내에서 만나면 되고, 날이 흐리면 아 좀 귀찮기는 하지만.. 최소한 ‘날이 흐려서' 약속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몸이 좀 안 좋네요 등등으로 둘러댈지언정.
그래서 그때는 진심으로 그들이 왜 저렇게 좋은 날씨에 목을 매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쟤네들은 왜 저렇게 해를 좋아할까’, ‘쟤네들은 새하얀 피부보다 태닝 된 피부를 좋아한대' 정도에서 생각이 그쳤던 것 같다. 그런데 스톡홀름에서 이 자유로운 영혼들을 왕창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해만 뜨면 벗어 제끼고(?) 풀밭에 드러눕는 사람들, 길을 걷다가도 볕이 비치면 눈을 지그시 감고 서서 해를 마주하는 사람들.
우리 반의 누군가는 나에게 스웨덴에서의 1년을 이렇게 설명했다. winter is coming - winter - fucking winter - still winter - no not yet - finally summer - winter is coming again. 아이들은 9월부터 나의 안위를 걱정하며 스웨덴 겨울을 조심하라고 했고, 어스름 봄이 오기 시작하자 스위디시 여름을 기대하라고 했다. 정말로 10월, 11월에는 갑자기 해가 뚝뚝 짧아져 오후 3시만 되어도 하늘이 보랏빛이 됐고, 내 몸과 마음도 함께 사정없이 어두워졌다. 그러다 해가 천천히 길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2월부터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괜히 웃음이 나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 길이와 기후가 바뀌고, 그와 함께 나무와 하늘과 강과 바다의 색이 변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것에 맞춰 삶의 방식을 바꾸고 어떻게든 그 안에서 할 일을 찾았다. 눈이 오면 스키를 타고 호수가 얼면 스케이트를 타고, 겨울 산을 하이킹했다. 여름에는 무조건 해가 드는 밖에 나가 해를 받고, 어디서든 풍덩 뛰어들어 수영을 하고, 늦게 지는 해를 바라보며 풀밭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다. 운이 좋게도 서울에서도 큰 공원들, 강과 산에 가까이 살았지만 그래도 공원은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이든 버스든 타고 마음을 먹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한강이 가까운 동네에 살았어도 한강에서 수영을 하려면 지하철을 타고 한강 수영장까지 가야 했다. 그러니 계절과 날씨가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잊고 산 것 같다. 비가 와서 우울하고 해가 나서 즐겁다, 아주 얕고 단기적인 영향만 주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이 사람들과 함께 겨울에는 눈밭을 헤치고, 여름에는 호수 같은 바다에 살금살금 몸을 담그고 나니 내가 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 문득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날씨의 영향을 받는 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나의 감정을 세심하게 살피는 것으로 다시 이어졌다. 그러고 나니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로봇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과거의 나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뭐가 되고 싶었을까?
아무튼 이 아름다운 자연의 한켠이 되어서 살아가는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고, 이렇게 살려고 하는 내가 마음에 든다. 런던의 그 넓은 하이드 파크, 햄스테드 히스 공원을 걸으면서도 아 발에 차이도록 많은 스톡홀름의 작은 공원들을 그리워했던 나를 생각하니, 나를 계속 이곳에 두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