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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Feb 20. 2019

제주에서, 사소한 삶 - 4

개와 사람의 시간 2 - 다른 무엇과 함께 살기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키우게 됐다. 생후 두 달 되었을 때 집으로 들어왔고, 잘 때는 딸아이의 방에서 잔다. 개나 고양이를 꼭 그렇게 자기 방에서 키워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는 이가 마침 래브라도 리트리버를 분양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렇게 다행한 기회에 정말 조막만한 크기의 강아지가 집으로 왔고, 자기가 키우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딸아이는 아침에 학교에 갔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잘 때만 쏙 데리고 들어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낮에는 온통 내 몫이 된 거다. 나의 성을 따서 조금이라고 이름지을 때 이미 그렇게 예정되어버렸던가 보다.



처음에는 금이를 품에 안는 것조차 서툴러서 개나 사람이나 서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남편과 달리 금이가 나의 손을 핥거나 아직은 작은 이빨로 나의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어대는 것에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미 키우고 있는 진돗개 구름이와 오래 살았지만 나는 그 오랜 시간동안 녀석과 어떤 스킨십도 시도하지 못했다. 평생을 개를 무서워하며 살아온 사람이니까 말이다.


개를 무서워하는 시간 동안 내가 못 견뎌했던 건 그런 거였다. 이물감 같은 것 말이다. 세상에, 내 손바닥에 닿는 개의 혓바닥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의 것이 아닌 말캉한 혓바닥의 피부 조직이 주는 그 낯설고 이상한 느낌이라니! 게다가 핥고 나면 저것의 침이 축축하게 남아 있을 텐데 그 느낌은 손을 씻어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또 견디지 못했던 건 그런 것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내가 “저리 가!”라고 했는데, 왜 저 아이는 들은 척도 않는가. 들은 척 않는 건 둘째 치고 어찌하여 더 가까이 다가와 킁킁거리며 혀를 날름거리는가. “나는 너 무서워!”라며 몸을 피했는데, 저것은 어째서 “멍! 멍!”하며 더 짖어대며 나에게로 오는가. 저렇게 귀는 닫아버린 채 이빨만 드러내 나를 물어 버리기라도 하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갈까. 우리 개는 안 물어요. 이런 건 정말 개소리다. 모든 개는 다 문다. 그게 개의 본성이다. 개에 물려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기는 건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아무튼 개라는 동물은, 아니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은 어떤 것들은 개를 포함하여 모두 나에게 철저한 타자일 따름이다. 나는 미소 짓는 타자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금이가 나를 핥는다. 손바닥도 핥고 발가락도 핥는다. 처음에는 조막만 했던 게 무럭무럭 자라 이제 생후 다섯 달 밖에 안 되었는데도 대형견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이빨이 가려워 아무거나 긁어대고, 니트를 좋아해서 나의 스웨터는 남아나지 않게 되었으며, 어찌나 반가워하면서 달려드는지 그 무게감에 휘청휘청 하고, 그 반가움 때문에 꼬리는 또 얼마나 세차게 흔들어대는지 꼬리의 동선을 따라 휘잉휘잉 바람 분다. 게다가 그 활기찬 꼬리에 맞으면 아프다. 놀아달라는 눈빛은 간절하고, 배가 고프다는 눈빛은 절박하며, 반가울 때 세상 더 없이 순정한데, 이 녀석은 매번 진심이다. 이름이 조금이라 그런가 누구라도 조금만 쓰다듬어 주면 배를 까고 벌렁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어 어떤 적의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매번 진심으로 말이다.


헌데 아직 구름이와는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있다. 구름이는 제 남편을 금이에게 뺏겼다고 생각하는지 이빨을 사납게 드러내고 금이를 문다. 금이도 이 어린 것이 지지 않고 으르렁 거린다. 둘 다 내가 무서워하는 개의 모습이다. 아직 둘에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둘은 아직 친해지지 못했고, 자매의 관계 개선에 애써야 하는 책임이 있는 만큼 구름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제는 구름이에게 핥으라고 손을 내어주고 있다. 녀석이 크게 짖어대면 나는 더 큰 소리로 녀석을 윽박질러 제압했는데, 이제 녀석이 짖는 이유를, 녀석이 처한 상황의 맥락을, 한 번 더 살피게 되었다. 모든 개는 물고, 우리 구름이도 나를 향해 언제든 달려들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금이가 매번 진심이듯, 구름이 역시 그럴 것이다. 그래서 구름이가 알아듣던 말던 나의 혼잣말 수다가 엄청 늘었다. 그뿐인가. 구름아, 오늘은 새를 몇 마리 잡았어? 땅은 적당히 파. 코가 다 헐었잖아. 구름이는 크르릉크르릉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꼬리만 흔들 뿐이다.



사실 구름이에게만 그러는 건 아니다. 세상에나, 남의 집 개한테도 마음을 열고 있다. 며칠 전에는 마트에서 낯선 개를 만났는데, 여느 때 같으면 에둘러 갔을 텐데도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나의 신발을 킁킁대도록 두었고, 내 쪽에서 먼저 말도 걸었다.


사실상 언어를 공유할 수 없다는 건 개만 그런 건 아니다. 불통의 인간들이 숱하고, 그런 경우 듣고도 못들은 척 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럴 때마다 모두 이게 인생이라며 넘겨왔던 시간들을 회상해 보았다. 게다가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하여 그들이 내게 적의가 없을 거라고 믿어버리는 건, 그건 순진함이라기보다는 오만함이다. 인간이 누리는 독점적 지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반성해 본다면 말이다.



언어의 공유가 중요한 것인가 정서의 공유가 중요한 것인가, 요즘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있다. 금이와 구름이를 대하면서 생긴 고민거리인 셈이다. 정서의 공유가 가능하다면 그것을 활자화할 수 없어도 언어가 생긴다. 정서 발생적 언어의 탄생. 그것의 상대가 개일 수도 고양이일 수도, 너구리일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동네에는 너구리를 키우며 산책시키는 이웃이 산다. 그리고 그 정서 발생적 언어를 사람과 공유하게 될 때 비로소 그와 특별해지는 거다. 친구가 되어 우정을 나누거나 연인이 되어 사랑을 나누는 일들이 가능해지는 거다.



어느 볕 좋은 날 모처럼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구름이가 마당에 나른하게 누워 나의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구름이와 눈이 마주쳤고, 내가 웃어주었다. 구름이는 하품으로 응답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오후를 그렇게 지켜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평화로운 시간을 깬 건 조금이었다. 거실에서 혼자 놀던 금이가 창밖의 구름이를 향하여 요란하게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름이가 쏜살같이 창으로 달려와 더 크게 응수했다.



둘 다 목청을 높이는 만큼 꼬리도 요란하게 흔들어댔는데, 이제 남은 숙제는 여덟 살 구름이의 언어, 5개월 금이의 언어, 마흔 넘은 사람의 언어, 이것들의 통번역을 수행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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