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금요일 Jul 06. 2018

'읽다' 혹은 '쓰다'-1

'읽은 것들에 대하여'  <만리장성과 책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력을 상실한 독서가 혹은 시력을 상실한 작가. 그러니까 시력을 상실한 보르헤스. 지극히 문학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은 지극히 가혹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들에 대한 수사는 곧잘 진부해진다. 나는 모든 것을 그의 탓으로 돌리겠다. 활자를 제대로 판독할 수 없는 그는 정확하게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으며, 군더더기 없이 자신이 본 것을 써내려갔다. <만리장성의 책들>도 다르지 않다.

책에는 시황제와 파스칼, 카프카와 오스카 와일드, 피츠제럴드와 버나드 쇼 같은 인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보르헤스가 마련한 이야기의 무대에 그들이 동원된 것일 수도, 그들 모두가 보르헤스적인 요소를 나눠갖고 있을 수도 있는데, 책장을 펼치면 사실 그런 식의 구분조차 불필요해진다. 마법 앞에 홀리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애착을 느낀다. 나나 내 수하의 형 집행관들이 그들의 애착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언젠가는 누군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은 내가 책들을 파괴시켜버린 것처럼 내가 세운 장성을 허물고, 나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릴 것이다. 그런 그는 곧 나의 그림자이자 나의 거울일 테지만, 그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만리장성을 축성하고 책을 불태워버린 시황제를 호명한 보르헤스는 만리장성과 책, 공간과 시간 혹은 공간과 문학예술이 존재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려 든다. 일례로 이렇게. 1979년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쿠빌라이 칸이 지은 궁전에 관한 글을 읽다가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궁전에 관한 시어들을 만났으며, 잠에서 깨어 꿈 속의 언어들을 되살려낸다. 그리하여 매우 정교한 한 편의 서정시 '쿠빌라이 칸'을 완성한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14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간추린 옛 이야기>에 이런 기록이 실려 있다. "쿠빌라이 칸은 그가 꿈속에서 본 뒤 잘 기억하고 있던 설계도에 따라 샹투의 동쪽에 궁전을 건설했다." 쿠빌라이 칸은 13세기의 인물이다. 정리하자면, 궁전은 먼저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 칸의 꿈에 등장했으며, 18세기 영국의 어느 시인의 꿈에도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전부가 아니다. 1961년 확인된 바에 따르면 쿠빌라이 칸의 궁전은 폐허로 남아 있었다. 재미있게도 콜리지의 시 역시 50행 정도만 간신히 전해진다. 애써 궁리하려 들자면, 이런 우연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그것을 무용하게 만드는 보르헤스의 강력한 철학.

"수백 년 후의 어느 날, 누군가가 같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는 예전에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꿈을 꾸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고, 그 꿈에 대리석이나 음악의 형상을 덧입힐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꿈들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바로 전의 꿈은 다음번 꿈을 위한 열쇠를 내포하게 될 것이다."

보르헤스 그는 지금 매우 우주적이면서 매우 문학적인 얘기를 들려주려고 하는 중이다. 그는 도서관에 있는 점성술사다.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속에서는 지식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분절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돌발적인 천재 혹은 박제된 작품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카프카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카프카의 시대와 삶 그리고 작품 사이의 관계 등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카프카 이전을 두루 살핀다. <성>을 말하기 위해서 '제논의 역설'에서부터 시작하는 식이다. "이 유명한 난제를 그대로 형식 상에 드러낸 것이 바로 카프카의 <성>이며, 운동자와 화살과 아킬레우스는 문학에 등장하는 최초의 카프카적 등장인물"이라는 게 보르헤스의 이야기다. 그는 또 브라우닝의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이나 레옹 블루아의 <불쾌한 이야기들>도 언급한다. 이유는, 카프카의 작품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카프카의 독창성을 희석시키려해서가 아니다. 그의 진의는 "후대에 카프카가 글을 써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선대의 그 글들 속에서 카프카적 특징을 감지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 있다. 이런 접근법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풍요롭게 만든다. 역사를 변주하는 힘이 인간의 문학적-상상적 활동에 있음을 그는 내내 알려주고 있다.

"모든 작가는 그들의 선구자들을 '창조'한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어 가듯이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념도 수정한다. 이런 상호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복수성은 하등의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만리장성과 책들>에서 독자들을 가장 짜릿하게 만들어줄 지적은 <돈키호테>, <천일야화>, <햄릿> 등의 작품들에 대해서 말할 때 흘러나온다. 세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 <돈키호테> 제 2부의 주인공들은 제 1부를 읽은 독자들이며, <천일야화>에서 왕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햄릿>에서는 햄릿이 관객이 되는 연극장면이 등장한다. 내가 읽은 이야기 속에 내가 등장한다는 것은 모종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이하고 낯선 경험이다. 동시에 불안하다. "픽션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 독자나 관객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전복이야말로 또 다른 독자이거나 관객인 우리 자신을 허구의 존재로 만들어버릴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짜릿한 전율이 인다.

이야기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나뉘어져 있지 않다는 그 마술적 상상력은 이야기의 존재 이유인 동시에, 이야기를 읽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나는 곧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도 좋다! 나의 세계는 그렇게 이야기와 더불어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보르헤스가 계속 쓴다. "1883년에 칼라일은 말했다. 우주의 역사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쓰고 읽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 스스로가 묘사되어지고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한 권의 책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상상한다. 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고 책을 불태우면서 시공간의 한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면, 나는 읽음으로써 우주에 개입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