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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Jul 08. 2018

물건에 관하여 –1  

썸띵 그린, 혹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환장할 나의 구원자,  그린 체어

나는 불과 몇년 전쯤에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을 알아냈다.  

“무슨 색깔을 좋아하세요?”

이에 대한 대답에는 변천사가 있다. 어느 시기에는 검은색이었다. 나는 그때 생의 가장 화창한 시절인 이십대를 지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최근의 회상을 통해서야 알았다. 재미있는 일이다. 까만색 다이어리, 블랙 진, 까만 구두, 온통 검은 색 천지였다. 심지어 당시 남자친구는 내가 아는 모든 남녀노소를 통틀어 가장 까만 피부의 소유자였다.

그러다가 아마 흰색으로 넘어갔던 듯싶다. 흑에서 백으로의 극단적인 선택! 모든 색들과 조화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매혹적으로 여겼던 것 같다. 빨강이었던 적도 있다. 노란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빨간색 시스루 블라우스를 입고 찍은 사진을 아직도 나는 갖고 있다. 무언가 결핍이 많았던 시절이었던가 싶다. 흘러넘치는 결핍을 감추기 위해서 온통 눈에 띄는 어떤 것으로 스스로에게 보상을 안겨주려던 그런 시절.  

그러던 나는 5년 이상 녹색에 머무르고 있다.

나는 아주 천천히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초록색 가방이 있다. 제주도에 정착할 무렵 큰 도움을 주었던 지인이 엄청나게 탐내는 가방이었는데, 나는 들고 다니지도 않으면서도, 그냥 고이 모셔두고 있다. 지인에게는 다른 식의 선물을 했을 따름이다. 나는 그 색깔의 가방을 독점하고 싶었다. 초록색 가죽 신발도 있었다. 이것을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닥이 너무 닳고 닳아 누가 봐도 한눈에 쓰레기임이 분명한 그것을 엄마가 버려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몹시 서운했다. 그것을 신고 다니는 동안에는 초록색 마법 양탄자를 탄 듯 마음도 걸음도 가벼웠다. 제법 비싼 신발이라 10개월 무이자 할부 찬스를 이용해서 샀는데, 나는 마치 단 한 켤레의 신발 밖에 없는 사람마냥 계절을 가리지 않고 신고 다녔다.  

얼마 전 파리 여행에서 나는 딥그린 박스 하나를 사들고 왔다. 방브 벼룩시장에는 너무나 많은 물건들이 자기들의 스토리를 속닥속닥 귓속말 들려주듯 나를 유혹했는데,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나는 자그마한 녹색 상자에 나의 사랑과 나의 지폐를 바쳤다. 멀리서 그것을 보았을 때 이미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사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네가 어떤 남자든 나는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하는 여자처럼. 다행히 그 안에 예쁜 티스푼이 들어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 말하자면, 티스푼이 아니라 담뱃재가 들어있어도 곱게 싸들고 왔을 거다.  

이건 병이야, 병! 이제 나의 친구들은 혀를 끌끌 찬다. 그들은 녹색이 들어간 것들은 구겨진 색종이까지도 내게 줄 기세다. “녹색은 구원의 색이에요!” 환경운동의 가치와 무관하게 마음대로 지어내서 곧잘 쓰는 말이다. 물론 귀담아 듣는 이들은 별로 없다. 서운하지 않다. 사실은 대중들에게 그렇게 매혹적으로 소구되지 않는다는 점까지 마음에 쏙 든다. 녹색이 깊어지면 신비에 가까워진다. 녹색이 라이트해지면 청량함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녹색이 언제나 세련되거나 매혹적이긴 쉽지 않다. 녹색은 튀거나 죽어버린다. 치명적인 녹색은 그런 거다. 영화 <아가씨>에서 김민희의 오프 숄더 드레스 같은 것. 그녀는 그 드레스를 입고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를 호명했다. 혹은 나를 작정하고 홀렸다.   

곰곰 생각해 보았다. 내가 가장 비자발적으로 용인했던 녹색이 무엇일까? 잘 떠오르지 않았는데, 딱 하나 있다. 녹색 어머니회?!

그래서 지금 나의 잇템이 썸씽 그린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절반만 옳다.

나는 지금 몇 해째 녹색 의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돈만 있으면 사는 거 아니냐, 우리 이 대화를 그런 식으로는 이끌지 말도록 하자. 사고 싶은 것들은 언제나 내가 갖고 있는 돈의 범위를 넘어선다. 생의 불행은 늘상 그런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다른 게 아니라, 의자다. 갖가지로 까다로운 품목인, 의자다. 머리에서 목으로 떨어지는 우아한 라인이 있으면 더 없이 좋겠고, 중추를 지나 허리를 받쳐주는 곡선은 완만하게 아름다워야 하는데, 그 아름다움은 인체공학적 디자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부분은 안락함을 극대화시켜주어야 한다. 이왕이면 팔걸이가 있었으면 좋겠고, 너무 낮거나 높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앉기에만 적당한 게 아니라 졸기에도 적당해야 한다. 나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무런 이유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졸겠다. 느슨하게 늘어져 책을 읽으려고 펴둔 채 졸겠다. 어떻게든 졸고야 말겠다.   

나만의 의자를 갖는다는 건, 의자가 주인공이 된 적당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이며, 그 의자를 중심으로 하는 소소한 일상이 가능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책을 보든, 커피를 마시든, 하다못해 창밖의 꽃잎이 지는 것을 바라보든 말이다. 의자는, 나의 의자는, 그저 덩그러니 놓여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의자는, 나의 녹색 의자는, 아무데나 두고 빨래 뭉치를 얹어두는 용도로만 쓰여서는 안 된다. 의자는, 나의 신비로운 초록색 의자는 마땅히 나를 구원할 의자라야 한다. 아아, 상상만 해도 체세포 하나하나까지 행복하게 이완되는 것 같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의미 없다. 무엇보다 아름답고 우아하며 깊은 녹색이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냥 녹색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 녹색 의자를 온갖 종류의 가구 사이트에서 찾아 헤매고 있는데 밤을 새기 일쑤다. 그저 밤을 새기만 하면 좋은데 선뜻 구매할 수 없는 현실 속을 온종일 둥둥 떠다닌다. 당연히 10개월 무이자 조건도 적용되어야 한다.

환장할 일이다.

하, 이런,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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