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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금요일 Jul 10. 2018

'읽다' 혹은 '쓰다' -2

-'타인의 글'의 형이상학, 나의 글의 존재 조건.

나는 요즘 통 읽지 않고 쓰려고 드는데, 도통 써지지 않는 시간들 때문에 종종 침울하고 괴롭고, 그래서 더 많이 게을러지고, 그런 이유로 읽기를 더 미뤄두는 그런 악순환 속에 있다. 나는 지금 한 줄일지언정 내 것을 쓰고, 그 다음에 타인의 것을 읽겠다는 자율적인 다짐 속에 사는데, 사실은 내내 나 자신을 의심하는 중이다, 그 의심의 끝에, 스스로 세운 다짐에 대한 어떤 반박문.  


 

자기 세계의 완전한 장악 혹은 자신에 대한 확신, 그것이 타인 없이 가능한 일일까?  

단연코 아니라고 대답하는 이가 있다. 이를 테면, 바흐친.  

“인간은 미학적으로 볼 때 타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또 보고 기억하며 모으고 종합하는 행위에 대해 절대적으로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로써 인간은 비로소 외부적으로 완성된 품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인데, 이 품성은 타자에 의해 창조되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에서 바흐친이 쓴 것이다.  

하여 다시금 바흐친을 빌어 얘기하건대, 타인을 지우는 순간 ‘자기에의 이해’는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 버리고 만다. 진정 삶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타인들의 삶 속에 있는 것 그 이상은 아니 셈이다.  


 

타인과 함께 누리는 것 가운데 가장 큰 영역은 아마도 언어생활일 텐데, 바흐친은 또 말한다. 언어의 삶을 위해 가능한 유일한 영역은 바로 대화라고 말이다. “타인의 말, 타인의 담론을 전달하고 평가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그 순간부터 그 언어를 함께 누리는 타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대화의 상대자로서의 타자뿐만 아니라 세상의 온갖 타자들 말이다. 아니 언어의 발생과 쓰임 자체가 이미 나 아닌 다른 것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대화(dialogue)가 두 개의(dia) 말(logue)인 것처럼, 타자에 대한 독해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바흐친은 세상 전체를 하나의 텍스트로, 모든 말은 그 텍스트에 대한 언급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대화는 전달되고 해석된 타인의 말로 가득 차 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우리는 ‘인용’이나 어떤 특정한 사람이 이야기 한 것에 대한 ‘언급’, 불특정 다수가 말한 것(‘사람들이 말하는데’, 혹은 ‘모두가 말하기를’ 따위)에 대한 언급, 자기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의 말, 자기 자신이 이전에 했던 이야기에 대한 언급, … 책 따위에 관한 언급과 부딪힌다.”

바흐친은 바흐친답게 그러한 대화성의 극치를 소설의 언어에서 찾아낸다. 그가 소설에서 찾아낸 것을 모든 글쓰기 영역으로 확장한다 한들 이상할 게 없다. 거의 대부분의 글쓰기는 신의 계시와 영감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라 타자에 대한 독해로부터 시작될 터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타인, 타인의 글, 타인의 세계를 ‘읽는’ 행위와 함께 간다. 물론 여기에 유아독존의 욕망이 개입할 수 있다. 가령 극단적으로는 쉼표나 마침표마저 누구와도 닮고 싶지 않다는 그런 욕망 말이다. 그러나 그 실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글쓰기란 제 아무리 내밀한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곧 세상에 대한 발언이다. 세계와의 소통이다. 그 결정적인 지점을 망각할 때 쓰기의 자폐에 처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타인의 글을 끌어들이는 글쓰기 방식의 대표는 아마도 인용일 테다. 인용은 단연코 그 형식으로서 이미 타인의 글을 드러낸다. 새로운 해석으로서의 패러디, 헌사로서의 오마쥬, 출처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결국에는 무례와 자기기만을 동시에 달성하는 표절 등의 방식 역시 인용의 세계 안에 있다.  

타인의 글이 없다면 인용 또한 없다. 그런 점에서 수사적인 차원에서의 인용은 상호텍스트적 수사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텍스트를 단지 문헌에만 한정시키지 않는 바흐친처럼 보다 넓게 생각한다면, 인용의 모자이크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그려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문학평론가 이상섭은 <‘명언’은 서양 사람들만 남기는가?>라는 글에서 글쓰기의 필연으로서의 인용을 이야기한다. 그 한 대목은 이렇다.  

“인용은 서로 다른 텍스트 사이의 대화를 촉발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론에서는 모든 사람의 의식과 그것을 표출한 말과 글은 결국 문화적 소산이고 문화는 문자 그대로 여러 다른 글들이 서로 얽혀서 짠 그물 같은 것이다. 텍스트란 본시 실로 짠 천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의식이나 말이나 글은 하나도 독립적이거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가 공유하는 문화라는 천의 몇 가닥을 이은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그 문화로부터의 인용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모든 말들은 서로 인용들끼리 대화, 곧 텍스트 상호성을 띠게 된다.”

때로 ‘인용’은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폭력적으로 말이다.  

그 오용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상섭은 누구보다 효과적이고 기술적으로, 요컨대 누구보다 문학적으로 인용의 묘를 살릴 줄 알았던 세르반테스를 기꺼이 인용한다. 가령, 세르반테스는 인용의 폭력, 인용의 오용 같은 걸 드러내기 위해서 고단수의 능청을 떤다.

“다른 책들을 보면 암만 황당무계하고 조잡한 것이라도,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과 기타 모든 철학자들로부터 인용을 해서 독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해박한 독서와 지식과 구변이 있다는 명성을 가져다주지 않나? 더더구나 성경을 인용할 땐 놀랍지! 모두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니면 교회의 박사님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 내 책에는 그런 게 하나도 없어. 여백에다 인용할 것도 없고, 책 끝에다가 주석을 달 것도 없으니까. 나는 내가 어떤 저자를 모방했는지조차 몰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성경, 그러니까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어떤 것을 인용할 때 우리는 어떤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인용자의 높은 지적 수준을 드러내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현학을 내세우며 타인의 글을 착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타인인 독자들에게 반박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일방적인 욕망은 인용을 폭력으로 만든다. 곧, 인용은 어떤 식으로든 타인을 정복하는 무기로 쓰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가령 플라톤을 인용함으로써 플라톤의 권위에만 기대는 그런 상황 말이다. 그것은 인용을 통해 거둬들일 수 있는 분명한 효과이며 어떤 면에서는 정당하기도 하지만, 곧잘 거인의 뒤에 숨어 있고만 싶은 비겁함이기도 하다.  

분명한 건 이런 거다. 대화가 대화로서 살아남고 인용이 인용답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타인, 타인의 글, 타인의 세계를 절대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게임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 그것은 게임의 규칙인 동시에 생존의 원칙이기도 하다. 그리고 게임 참가자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대화는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인정이지 절대적인 복종과 추종은 아니다. 인정하면서도 대결할 수 있다. 그래야 한다. 이상섭 또한 그런 걸 얘기한다.  

“인용의 묘미는 동질화와 이질성의 동시적 작용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특수한 긴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인용구는 새로운 문맥적 환경에 연결되는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 인용구는 그것의 원천인 텍스트를 새로운 텍스트 속에 침투시킨다. 그리하여 인용을 받아들인 텍스트를 새로운 텍스트 속에 침투시킨다.”

그러한 침투의 상호 작용이 텍스트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다.  

타인들로 가득한 세상을 소화하는 것이 글쓰기의 전제라고 한다면, 글쓰기의 아주 작은 시작은 타인의 글을 읽는 것에 있을 수 있다. 쓰려고 들지 않고도 읽을 수는 있지만, 읽으려 들지 않고는 쓸 수 없다.  


 p.s. 나에게는 타인이, 타인의 세계가 절대적으로 희박하다. 그러므로 쓰고 싶은 것을 쓸 수가 없다.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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