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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Mar 05. 2020

산책은 소주병에서 시작됐다

일주일에 두세 번, 산책한다. 자취방 뒤편 수봉산은 한 시간 정도 걷기 적절하다. 그곳은 높이가 100미터 남짓이라, 산이라 부르기엔 과분하고 동산이라 표현하기엔 애매하다. 수봉산으로 등산 간다고 말하기도 어색하니 산책한다고 적어 내린다. 수봉산 정상에는 공원이 있다. 공원 이름은 산 이름을 따라지으니, 수봉공원이라 불린다. 수봉공원은 노을 맛집이다. 야경도 그에 준한다. 해가 지는 시간에 맞춰 산 정상에 도착하면 노을과 야경을 모두 맛볼 수 있다. 산뜻한 산 공기는 디저트다. 해는 보통 저녁 6시 전후로 진다. 자취방에서 산 정상까지 어른 걸음으로 30분쯤 걸린다. 저녁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출발하면 딱 맞춰 목적지에 도착한다. 5 천보 정도 걸어서 꺼진 뱃속을 노을과 야경으로 다시 채우고 내려온다. 이제는 습관 같은 게 됐다. 습관을 만들자며 의도한 건 아니고, 물 흐르듯 이리저리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니 자리 잡은 생활 루틴이다. 새해 목표든 To-Do 리스트든 삼일천하가 고작이니 말이다.    

  

습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습관이라는 게 참 고착화시키기 어렵다. 의식적으로 습관을 몸에 베이게 하려고 해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신경 쓰면 쓸수록 멀어지기 마련이다. 흔히 생각하는 좋은 습관은 들이기 더 어렵다.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이라 그런가 보다. 예컨대 뭐가 있을까.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기. 일어나서 자기 계발하기. 특히 영단어 외우기나 신문 읽기, 술과 담배 줄이기, 커피 대신 차 마시기. 저녁 먹고 조깅하기. ‘내일부터’라는 접두어를 달고 나오는 의지들이 그것이다. 그러니 <습관의 힘>이나 <아주 작은 습관>, <메모 습관들이기>처럼 습관을 키워드로 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꿰차나 보다.      


저자들은 습관을 들이는 노하우를 다채롭게 제시한다. ‘14일의 법칙’이라든지, ‘메타 인지’라든지. 신경 분석학이나 뇌과학 이야기도 책에 간혹 등장한다. 어떻게 생겨먹은지도 모르겠는 내 뇌를 분석하고 헤집어 놔야 습관이라는 게 생기려나. 같은 한글인가 싶을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들 사이에서 그나마 받아들일 만한 요소를 찾은 적 있다. 계기. ‘트리거(trigger)’라고도 한다. 결국 같은 말이다. 습관을 만들 만한 계기를 마련하라는 이야기다. 호감이 가는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저녁마다 조깅을 한다든가, 연애편지를 더 멋스럽게 쓰려고 매일 시를 한 구절 씩 베껴 쓰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결국 정답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해내다 보면 마치 ‘마법처럼’ 내 몸에 습관이 스며든다는 메커니즘이다. 내 산책 습관의 시작에도 계기라 불릴만한 것이 있다. 사랑이나 꿈, 목표처럼 거창한 건 아니다. 단순하면서 동시에 극적인 것이다.      



내 계기는 소주병이다.      


돌이켜보면 그 소주병에서 산책 습관이 돋아났다. 푸른 소주병. 그것도 깨진 소주병. 바닥에 힘껏 내리쳐 산산조각이 난 소주병. 이윽고 수류탄이 터지듯 사방팔방으로 튀어버린 소주병. 결국 내가 내 손으로 그 병을 부여잡고 부셔버렸단 이야기다.      


시작은 이렇다. 망원동 어딘가, 허름한 갈매기살 집에서 얼큰하게 마셔댔다. 9월이었고, 선선한 여름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따라 4캔 만원 맥주를 들고 한강 둔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가 시멘트 둔치에 걸터앉아, 맥주를 모두 해치웠다. 친구 손을 부여잡고 근방 노포 집으로 향했다. 뜨끈한 번데기탕이, 스팸과 계란 프라이가 좌판을 채웠다. 술안주는 귀국한 지 두 달이 채 안된 20대 후반 백수 이야기.


주변이 소란스러웠는지, 머릿속이 시끄러웠는지 수다도 잡념도 술병처럼 쌓여갔다. 그중 하나는 어느새 내 손에 들려있었다. 고등어 떼가 뇌 주름 마디마디를 휘젓는 기분이었다. 술이 달아올라 두통이 느껴지는 상황과는 달랐다. 머리가 팽창한다고 표현해야할까. 멈춰야했다. 한계치에 다다르면 머리가 터지든, 이 자리가 터지든, 아니면 내 손에 쥐어진 병이 터지든 할 것이다. 세번째 옵션을 택했다. 펑. 오른손을 떠난 병은 길바닥을 향해 날아가 서슬이 퍼런 유리조각들로 변했다. 찰나의 순간, 정적이 흘렀던가. 여름 밤하늘처럼 잠시나마 조용했다.      


소주병이 바닥에 던져진 이후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정적을 깬 이는 옆 테이블 손님. 그는 파편 하나가 인도를 넘어가 자신의 차량 오른쪽 앞 범퍼를 난도질했다는 논리를 폈다. 뽑은 지 얼마 안 된 벤츠였다고 했나. 나와 친구 둘, 차주와 차주 일행 둘. 도합 여섯이 흰색 벤츠를 중앙에 두고 강강술래 하듯 돌아다녔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근방 지구대에서 경찰 둘이 노포에 등장했다. 둘 중 더 젊은 경관이 내 신원정보를 물었고, 난 답했다. 변호는 친구 둘이 맡았다. 벤츠 주인은 있는 호들갑 없는 호들갑을 전부 떨었다. 자리는 다시 시끄러워졌고, 경찰차 사이렌이 내뿜는 붉고 푸른빛이 정신을 빼놨다. 도망치듯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비는 5만 원쯤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할증요금이 붙어서 마음이 아팠다.      


숙취는 없었다. 전날 밤 소란을 부정하듯 자취방은 고요했다. 커피포트로 물을 끓이고 커피 가루를 반 스푼 정도 넣어 마셨다. 아버지가 매일 새벽일 나가시기 전에 하셨던 습관이다. 아버지를 닮아가나 보다. 한 모금, 두 모금 이어 세 모금쯤 마시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라디오를 트니, 정오의 희망곡이 흘러나왔다. 해가 중천이 돼서야 일어났나. 커피를 한 모금 더 목구멍으로 흘려보내고 어제를 복기했다.


어제 나는 뇌관이 터졌다. 총알을 허공으로 날린 뒤 식어버린 빈 탄피가 된 기분이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무언가를 마음 한편 어딘가에 눌러 놨는데, 이것이 빈틈을 찾아 튀어나왔다고 생각했다. 부동산 시장에 풍선효과라는 말이 있는데, 딱 이 짝이다. 한쪽을 압박하면 다른 한쪽에서 사고가 난다. 문제는 그 풍선이 터져버려서 흐물흐물한 고무조각이 됐다는 사실이다. 유리파편처럼 조각난 마음을 이어 붙일 수 없었다. 이미 내 손을 떠났다. 그래, 전문가의 손을 빌릴 때다.

     

정신병원을 정신건강의학과로 부른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아무래도 전자는 어감이 드세니까. 학교 앞에 적당한 정신건강의학과가 있었다. 오후 3시부터 논어 수업이 있었지만, 공자는 의사가 아니었다. 예약 전화를 걸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상담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이력이 남으면 취업준비에 걸림돌이 될까 싶었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인데 취업준비를 걱정하고 있다니. 내 신세도 참 딱했다. 지역번호와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인간미 없는 자동응답기가 나를 상대했다. 그녀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만 건넸다. 5분은 그대로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안 받는다. 전화를 끊었다. 나 같은 취준생이 몇 명 더 있나 보다.      


상담 전문가인 한 살 형에게 대신 전화를 걸었다. 학교 앞 병원을 몇 개월간 다녔기도 했다. 좌초 지종 사건들을 설명했다. 형은 상담을 받아보길 권장했다. 단, 먼저 산책을 다녀올 것. 조건부 권장이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닻을 잃어버린 조각배처럼 걸어보고, 그래도 진정이 안 되면 의사 선생님을 만나라고 조언했다. 신발장 한쪽에 먼지 쌓인 회색 나이키 운동화가 보였다. 그렇게 시작됐다. 수봉공원 산책은.


산에 오를 때 마다 조각난 소주병을 생각한다. 곱씹어보면, 그것은 소주병이 아니었다. 옛 나였다. 그리고 옛 내 모습은 여름밤을 고요하게 갈랐던 소주병과 함께 부서져 버렸다고 여겼다. 아무래도 나는 나를 박살내고 싶었던 거다. 그는 안타깝지만 그날의 적막과 함께 흩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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