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오사카를 보냅니다
이 글을 쓰는 곳은 오사카 간사이 제2 공항 활주로입니다. 몸을 실은 제주항공 7C1375편이 기체 결함으로 잠시 멈췄습니다. 덕분에 3박 4일을 보낸 오사카에서 1시간쯤 더 보낼 수 있습니다. 출국이 늦은 항공기에서는 출발 시간을 맞추지 못해 민망한지 이내 이륙곡으로 양방언이 쓴 ‘민트 아카데미’가 흐릅니다.
재일교포 양방언은 조카 대학 입학식을 다녀온 뒤 이 곡을 작곡했습니다. 조카가 새로운 세계로 처음 발을 들이는 순간을 기억하려는 듯, 그는 설렘과 기쁨을 곡에 가득 채웠습니다. 이 노래가 익숙하다면, MBC 라디오 <우리말 나들이>에서 여는 노래로 이 곡을 사용하기 때문일 겁니다.
김포에서 오사카로 출발하는 제주항공 7C1384편에도 같은 노래가 흘렀습니다. 서정적이면서도 경쾌한 리듬이 흐르는 노래는 첫날 느꼈던 감정을 다시 기억해 보라는 신호처럼 들립니다. 화면 잠금을 풀고 사진을 담은 앨범을 엽니다.
오사카는 처음이었습니다. 숱한 첫 느낌들이 며칠 동안 오고 갔지만, 사진은 감각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장면뿐인 오사카가 앨범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감각을 붙잡는데 씁니다.
분명 감각을 잊을 겁니다. 그러니 첫 오사카를 잊지 않기 위해 글로 발버둥 쳐보렵니다.
10월 첫째 주, 태풍 끄라톤이 대만을 지나 일본 남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비 내리지 않는 먹구름이 간사이 공항 상공을 덮었습니다. 볕을 받지 못해선지, 간사이 제2 공항은 초라해 보였습니다. 800만 명이 사는 도시 출입구라기엔 어둑한 듯 밋밋한 컨테이너 건물이었습니다.
밋밋한 도시. 오사카를 만난 첫인상입니다. 인천공항이 갤러리아 식품관이라면, 간사이 제2 공항은 도시 외곽 창고형 매장을 닮았습니다. 아이보리색 거대한 컨테이너는 겉모습만큼이나 속도 단출했습니다. 입국장으로 가는 길엔 흔한 광고판 하나 없습니다. 말끔한 입국장을 지탱하는 기둥 사이에 무채색 시티즌 벽걸이 시계만 걸려 있을 뿐입니다. 시계마저 꾸밈이 없습니다.
공항에서 오사카 난바로 향하는 열차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일부 구간처럼 지상철입니다. 밖을 보니 무채색이 이어집니다. 시티즌 벽시계에서 나온 무채색은 간사이 제1 공항에서 잠시 사라지는가 싶더니, 공항을 벗어나자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사카 근교 동네들 그리고 수놓은 주택들은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가끔 보이는 광고판이 등대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난바 일대는 달랐습니다. 화려함을 넘어서는 밝은 공간들. 동대문 일부와 건대 입구 지상철교, 종로와 홍대 술집 골목을 뒤섞은 휘황찬란한 공간들이었습니다. 유흥 거점인 난바역 일대, 도톤보리, 신세카이 모두 과할 정도로 밝았습니다.
화려한 오사카는 밋밋한 첫인상 때문인지 아이러니해 보였습니다. 수수할 것만 같은 친구가 한껏 멋들어지게 꾸민 모습이 어색한 것처럼, 이 모습과 저 모습 사이 이격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화려함의 끝단을 달리는 공간을 살짝만 벗어나도, 과함은 이내 사라졌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모습입니다.
공사 현장은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소음을 줄였다기보다, 인부들이 군더더기 없이 움직입니다. 건물 외벽을 감싸는 비계망은 베이컨을 포장한 듯 건물을 말끔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골목 사이에 자리 잡은 목공소는 주방처럼 깔끔합니다. 내부 설비와 기자재, 지게차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정리된 창고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오사카 사람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브랜드 모를 시골 자전거처럼 보입니다. 앞에 바구니가 달린 일상용 자전거인 ‘마마차리(ママチャリ)’가 대부분입니다. 짱구에 나오는 그 자전거입니다.
음식이 과하지 않습니다. 맛은 자극적이지 않고, 심지어 국물 온도도 적당합니다. ‘앗 뜨거워’라고 외친 건 숙소에서 끓인 컵라면을 먹을 때뿐이었습니다.
땅거미가 지는 시간과 오사카의 화려함이 시작되는 틈. 노을이 모습을 감추는 길을 따라, 장 보러 갔습니다. 오늘은 술집 거리를 멀리하고, 조촐하게 끼니를 때울 속셈이었습니다. 멀리선 작아 보였는데 나름 큰 마트였습니다. 대형마트라기엔 규모가 작지만, 동네 슈퍼라기엔 덩치가 있었습니다.
과장을 보태서, 우리나라 절반 가격인 초밥에 눈이 뒤집혔습니다. 여러 팩을 쟁여놓을까 하다가 한 팩만 집었습니다. 그렇게 이것저것 집다 보니, 손이 크지 않은 편인데도 카트가 이내 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트 카트가 작습니다. 우리나라 대형마트 카트와 비교하면 반의 반 수준입니다.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를 간신히 올려놓을 정도로, 농협이나 하나로 마트에서 사용하는 카트를 닮았습니다.
아쉬울 줄 알았는데, 충분히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초밥은 열 피스 정도가 적당했던 겁니다. 적당함을 몸이 기억하지 못했나 봅니다.
오사카의 밋밋함은 사실 적당함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으로 좋고, 이것으로 최고다가 아니라, 이것으로 적당하다. 그러니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 무인양품 디자이너 하라켄야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점심에 뭐 먹을까 했을 때, 우동이면 됐지 뭐.' 하는 느낌인 겁니다.
물론 꾸미고 표현하는 일을 낮게 보진 않습니다. 다만 과하지 않아도 될 것을 거창하게 표현한다면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모습일 겁니다. 도톤보리와 신세카이에서 마주한 오사카가 어색해 보였던 이유일테죠.
충분함은 약간의 포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더 할 수 있지만, 넘치지 않도록 어느 정도 선을 긋는 것. 스스로 선택한 포기이기에 처절하지도 아쉽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치장하지 않으니 간결한 미의식이 생겨날 여지도 있습니다.
어쩌면 뭐든지 딱 그 정도로 충분했던 건 아닐까. 파워 게임에 적응한 나머지, 크고 길고 넓고 두껍고 가득 찬 것들에 감탄해 왔습니다.
이 정도로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면, 이제 오사카를 떠올리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