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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mtip May 16. 2024

대체로 당당하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오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모습은 몸도 마음도 노쇠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냐고 물어온다면 단번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육신은 비록 늙어 삐걱거리지만 마음은 단단하며 취향은 확고하다. 


1. 걸음은 느려도 내가 가고 싶은 곳까지 거침없이 간다. 

"환자분, 진료실은 오른쪽이에요. (손으로 가리키며) 저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라고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사실 저쪽엔 문이 세 개나 있다. 진료실 옆에 초음파실, 초음파실 옆에 주사실이 있다. 자 그렇다면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어디로 가실까. 늘 궁금하다. 대부분 당신이 생각한 문을 정해놓고 출발하시기 때문이다. 망설이 없이 고개를 들고 걸어가신다. 뒤에서 "환자분! 환자분!" 하고 불러도 "나 잘 가고 있지?" 하며 손까지 흔드시고는 주사실로 들어가신다. 그럼 다다다 뛰어가서 방향을 틀어드리는 건 내 몫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 한번 사는 인생. 이렇게 가는 거다. 내가 생각한 저쪽으로 그냥 가보는 거. 문 앞에 뭐라고 쓰여있던 그냥 들어가는 거지. 이 정도는 되어야 험한 인생 깔깔대며 사는 것 아니겠나 하는 그런 생각. 그리고 실제로 할머니와 나는 박장대소한다. 

"아.. 저쪽이 이쪽이여?"


2. 내 친구는 내가 지킨다.

할머니 환자분들은 90% 이상 동네 친구분들과 함께 병원에 오신다. 혹은 먼저 오셔서 친구를 기다리신다. 내가 살면서 친구와 함께 병원을 가본 적이 있는지 기억을 샅샅이 헤집어 봐도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내가 80이 되면 친구손을 잡고 병원을 갈 건지는 미지수지만 어찌 되었던 이분들은 함께 오신다.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마취통증의학과에 오면 거의 주사치료를 받기 때문에 엑스레이를 찍어야 하는데 보통 본인들의 몸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시므로(?) 안 찍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난감해서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찰나. 함께 온 친구가 혼을 내기 시작한다. 

"네가 의사냐? 어? "로 시작해서 가족사까지 들추게 되는데 희한한 건 친구가 그러건 말건 상관도 안 할 것 같이 딴청을 피우다가도 대부분 엑스레이를 찍으러 간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판 싸우고 집에 갈 법도 한데 껄껄 웃으며 둘이 손잡고 치료 잘 받고 나가신다.  거침없이 할 말 다 하면서도 친구의 눈치를 보지 않는 그 모양새. 온갖 욕설까지 다 듣고도 전혀 속상하지 않은 할머니들의 세계. 어찌 내가 범접할 수 있으랴.


3. 립스틱 좀 발라봤어.

날씨가 풀리면서 어르신들의 옷이 참 화사해진다. 연예인들이 무대에서나 입을 법한 쨍한 분홍 재킷을 시작해 할아버지 한분은 힙합모자에 통바지를 늘 고수하신다. 모자도 매일 바꿔 쓰시는데 그 열심과 정성이 대단하다. 오늘 예뻐 보이신다고 한마디 거들어 드리면 예쁘긴 뭘...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거의 없다. "응, 립스틱 좀 발라봤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모자는 새로 사셨나봐요" 하고 여쭈어보면 딱 당신 스타일이라 사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신다. 

멋있다. 누군가 나에게 오늘 참 예쁘다는 칭찬을 했을 때 흔쾌히 그 말을 받아들인 적이 있었나? 아니. 손사래를 치거나 아니라고 대답했을 거다. 

그런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예쁘다면 내가 오늘 예쁜가 보다 하고, 멋있다면 멋있다보다 한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예전만큼 마음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아 무기력할 때도 있지만 인생 70, 80 살아오면서 단단하게 굳어진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 그래서 이들은 대체로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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