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만 안아줄래? 눈처럼 사라질 수 있도록,
안녕 카이?
나야. 너를 이 곳으로 데려온.
그동안의 일을 네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까마득한, 아득한 기억.
많은 사람들이 내가 너를 이 곳으로 데려온 이유를 궁금해 하곤 해. 왜 이 추운 곳에 너를 가두었는지. 눈으로 만들어진 얼음 궁전에 너를 꽁꽁 묶어둔 채로, 내가 네게 하고 싶어 했던 말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해.
어쩌면 너조차 잊었을 이야기.
그래서 나만이 해줄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
너는 아름다웠지. 그 따듯한 눈동자 속에서 나는 오래오래 행복했어. 가끔 넌 이름 모를 꽃을 꺾어서 내 손에 조심스레 쥐어주곤 했는데, 이제 그 생각을 하면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쓸쓸해져. 그래서 보다시피 내 얼음 궁전에는 단 한 송이의 꽃도 들여놓지 않았지.
피어날 수 없도록.
아무것도.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너의 장갑을 나눠 끼기도 했고, 내 로션을 나눠바르기도 했어. 너의 뺨에서 나의 향이 날 때면, 나는 왠지 안심이 되곤 했었다. 우리 이대로 영원할 것만 같아서. 따듯했던 너의 손. 너는 그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곤 했었는데...
아빠의 손길 보다 부드럽던. 엄마의 품 보다 더 따듯했던. 나의 계절. 나의 봄.
그렇게 너와 있을 때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어.
그래도, 흐르는 시간이 전혀 아깝지가 않았어.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너는 차갑게 변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지. 사람들은 그게 악마의 탓이라고 수군거렸어. 한 악마가, 비추면 모든 것이 추해져버리는 거울을 들고 신에게 장난을 치러가다가 그 거울을 하늘에서 깨트려버렸대. 그리고 그 파편 중 하나가 네 눈에 들어가게 된 거라고.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너는 그토록 사랑했던 나를 미워하기 시작한 걸까? 나는 언제나 너를 사랑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는데...
그렇게 네 눈빛은 나를 찌르기 시작했지.
찌르고, 찔리면서 나는 홀로 많이 아팠어. 변해가는 네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지.
그래서 모든 걸 얼려버리려고 한 거야. 그렇게라도 우리의 시간을 멈추고 싶었어. 다시 한 번 따듯한 너의 눈동자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 만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어.
나를 사랑하지 않는대도 괜찮았어. 그냥. 네 옆에 있고 싶었어.
하지만 변해버린 네 옆에서 나 또한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하더라. 의심하고, 집착하고, 날카로워져갔지.
그런 내 모습이 나 조차도 너무 싫었다면, 너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있잖아, 카이.
이제 나는 변해버린 너보다
이렇게 꽁꽁 얼어버린 내가 더 미워.
카이. 이제 조금 기억이 나니?
아직도 너의 눈은 텅 비어있구나. 여전히 나를 바라봐주지 않아. 나는 정말 알고 싶어.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왜 이제는 끝났다는 말로 이렇게 처참하게 나를 외면하는 지.
지금 이 곳으로 오고 있는 그녀 때문인 걸까?
있지, 나는 얼굴도 모를 그녀가 너무도 부러워.
너는 이제 곧 그녀의 손을 잡고 이 곳을 떠날 테지. 변해버린 너를 되찾을 수 없는 내게 허락된 건, 이제 순순히 너를 놓아주는 일 뿐이야.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될 거야. 아마 외롭겠지. 사무치도록.
그녀가 성 밖에 도착했어. 이제 정말 우리의 마지막이구나.
그래서 말인데, 한번만 안아줄래? 내가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도록.
그리고, 늘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던 ‘단어’가 있어.
여기에 두고 갈 테니 맞추어봐. 너와 함께 했던 시절에 내가 꿈꾸던 단어, 아니. '우리'가 꿈꾸던 단어.
안녕 카이.
내가 사랑했던 나의 카이.
이제 나를 똑바로 바라봐.
나는 눈의 여왕.
게르다, 그녀 이전의 게르다.
한 때 네가 사랑했던,
너의 연인.
안데르센 / 눈의 여왕
어느 날 못된 악마가 거울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뭐든지 다 흉측하게 보이는 거울이었습니다. 악마는 거울을 하늘로 옮기다가 그만 떨어뜨려 깨뜨립니다. 산산조각 난 거울은 먼지처럼 떠다니다 사람들의 눈과 마음으로 파고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차갑고 잔인하게 변해 버렸습니다.
어느 작은 도시에 카이라는 남자아이와 게르다라는 여자아이가 살았습니다. 둘은 아주 친한 친구여서 마주보는 다락방 장미 정원에서 함께 놀며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의 눈과 마음에 악마의 거울 조각이 박히고 맙니다. 그 날부터 카이는 못된 아이로 변해 갔습니다. 그해 겨울, 카이가 눈밭에서 썰매를 타며 노는데, 눈의 여왕이 나타나 카이를 눈의 여왕의 성으로 데려가 버립니다.
봄이 되자 게르다는 카이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요술쟁이 할머니 집에 잡혀 지내기도 하고, 카이를 닮은 왕자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다 그만 산적에게 잡혀 산적 소굴로 가게 됩니다. 게르다는 산적 소굴에 사는 비둘기로부터 카이가 눈의 여왕의 성에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게르다는 즉시 카이를 찾아 눈의 여왕의 성으로 떠납니다. 눈의 여왕의 성에 이르러, 게르다는 눈의 여왕의 호위병들과 한판 싸움을 벌입니다.
이 싸움에서 카이를 향한 게르다의 사랑의 힘이 천사로 변해 여왕의 호위병들을 무찌르고, 마침내 게르다는 카이를 만납니다. 게르다의 뜨거운 눈물에 카이 마음속에 박혔던 거울 조각마저 녹아 내립니다. 또 카이가 게르다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카이 눈 속에 박혔던 거울 조각도 빠져 나옵니다. 순간 '영원'이라는 얼음 글자도 맞추어집니다.
게르다와 카이는 손을 잡고 옛날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어느새 둘은 아이에서 숙녀와 청년으로 자라나 있습니다. 둘은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