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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CUNA Nov 29. 2015

첫 눈 오는 날, 내 연애의 발견.txt

소소하게 써보는 연애소'썰'

01.


오늘 내가 그와 만난다면 우리는 일주일 만에 얼굴을 보는 셈이다. 그동안 날씨는 시간보다 더 성급히 추워져서, 오늘 아침에는 첫눈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날씨에 대한 예고를 나는 믿지 않는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다른 연인들에게 일주일만의 만남은 흔한 일이겠지만 우리에게 요 사이의 7일은 조금 특별했다. 저번 주는 그와 내가 만난 지 정확히 368일이 되는 날이었으며 우리는 조금 지난 1년을 기념한다는 이유로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야경이 예뻤고, 식전의 샐러드가 생각보다 덜 싱싱했던 것만 빼면 꽤 괜찮은 시간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저녁이 지난 아침, 샤워를 마치고 소매 끝을 정리하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물었다.

「왜 나한테 한 번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아?」
그는 거울 속에 비친 나와 눈을 맞추며 피식 웃었다.
「아껴두는 거지. 원래 소중한 말은 아껴두어야 그 가치가 보존되는 법이라잖아.」
나는 가끔 보이는 그의 저런 여유로움을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삐죽한 목소리로 곧장 되받아친다.

「그래도 희소한 모든 것들이 꼭 가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는 결국 내게로 와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가 내게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번에도 이 방법이 먹힐 거라고 생각해서이다. 아마 이렇게 하면 내가 안심할 줄 알겠지.


 그렇지만 이번엔 어림도 없어.




「왜? 또 불안해?」

 또 불안이라니, 연애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면서 내가 이렇게 불안해하는 이유를 그는 정말 모르는 걸까. 하지만 나는 그가 뒤이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정확히 안다. 아마 우리의 사소한 순간들을 느껴달라고 이야기하겠지. 내가 아침에 일어나 너에게 잘 잤느냐고 인사를 건네는 것. 그렇게 밤사이의 네 안부를 묻는 것. 맛있는 걸 먹다가 너를 생각하는 것. 너의 손을 잡고 안도하는 것. 그런 것들 사이에 너를 향한 내 사랑이 있다고. 나를 믿어달라고.


 그렇지만 그를 만나기 전에 이미 몇 번의 연애에 실패한 나는, 그런 일상들이 결국은 마음을 식어버리게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안다. ‘당연해지는 건 싫어. 난 너에게 당연하고 싶지 않아. 그걸 확인시켜줘.’ 하지만 또 동시에 내 알량한 자존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이런 말을 내가 먼저 꺼내고 싶진 않다고. 그래서 나는 그냥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어제의 저녁을 거나하게 먹었으니 오늘의 아침은 가볍게 샌드위치에 커피를 먹기로 했다.
 주말 아침의 카페는 한산했고 우리는 그런 카페의 분위기에 맞게 한동안 침묵했다. 커피가 식어가는 동안에도 서로의 침묵시위는 계속 되었다. 결국 퉁퉁 부어있는 입을 뗀 쪽은 나였다.  

「일주일동안 생각해봐. 내 생각에 이 문제가 계속 반복된다면, 우린 만날 수 없어. 아마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그동안 연락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미간을 모으고 입 꼬리를 내린다. 이 표정은 곤란하거나 ‘머리 아프게 되었네’라는 그의 의사표시이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린 한참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결국 카페의 앞에서 각자의 길로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얼핏 서러워졌고, 그래서 조금 울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드는 늦가을 바람에 순간적으로 그의 따듯한 손이 생각났지만, 나는 이제 일주일 뒤엔 그것과 영영 작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만 울기로 했다.





02.


 결국 그 날 저녁에도, 그 이튿날 저녁에도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이틀 정도 가량 연락을 기다리던 나도 이젠 슬슬 지쳐갔다. 도대체 그 한마디가 뭐가 어려워서, 자기가 사랑한다는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그가 괘씸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중요한 게 뭔지를 모르는 사람과는 도무지 연애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나는 그 다음날부터 사우나에 가서 손끝과 발끝이 팅팅 불을 때까지 물속에 잠겨있기도 하고,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기도 하고, 한동안 미뤄왔던 뿌리 염색을 위해 미용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다 5일째 되는 날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2년 전 결혼한 유부녀, 아이는 이제 갓 돌이 지났다.
시시콜콜한 아가씨의 연애 이야기에 엄마가 되어버린 내 친구의 반응은 역시나 시큰둥하다.   

「야, 뭐 그런 거에 집착 하냐? 너네 오빠 말이 맞네. 그냥 일상에 충실한 게 훨씬 중요하지. 번지르르한 백 마디 말보단.」

 아이를 품에 안고 나에게 훈계하는 모습에는 이제 엄마도 있고, 교복을 입은 그 시절의 내 친구가 있고, 나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어느 덧 가정을 꾸린 한 여자가 있다.

「야,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안할래? 생각해야 할 텐데? 너 내가 형부한테 입만 뻥긋하면 그날로 부부싸움이야.」

 말도 안 되는 내 협박을 듣고 친구는 까르르 웃는다. 문득 새삼스럽다. 저 애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가. 그 아이를 안고 있는 내 친구의 안정된 모습이.
 아이의 손짓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친구는 커피를 마신다. 누군가를 품안에 안고 있다는 건, 저런 사소한 순간들에도 책임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너 어린왕자 좋아한다며. 거기에도 나오잖아. 진짜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제발 내 인생 문학을 가지고 설교하지 말아줄래?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친구는 웃으며 언성을 높인다. 야! 이거 내가 결혼하기 직전에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질 때 네가 한 말이거든?
 나는 이제 정말로 할 말이 없어진다. 남의 일이 내 일이 되면 이렇게나 어려운 거구나. 내가 오만했었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며 그녀는 이야기한다.

 너야말로 생각해봐. 사랑한다는 그 말이 중요한 건지, 그 말을 해줄 너의 사람이 중요한 건지. 표현방법이 달라서 헤어지는 건 좀 아쉽잖아. 물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를 어떻게 사랑해야하는 지 그 방법을 아는 것이라지만, 내가 보기엔 너 또한 그를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 아직은 미숙한 거 일수도 있어.

 나는 뚱하게 뭔 소리야 이 아줌마야. 사랑의 상대성이론이야 뭐야?, 라고 대답했지만 집에 오는 길에는 못내 그 대답이 고마워졌다.






03.


 결국 일주일째가 되던 날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고, 자주 가던 카페에서 몇 시에 보자라는 짧은 이야기만 전한 뒤 전화는 끊겼다.



 코코아 색보다 약간 붉은빛이 도는 터틀넥 스웨터에 검정색 스키니를 입고 립스틱의 색깔을 고르는 동안, 나는 문득 우리 정말 이대로 영영 헤어질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예전과는 다른 이유로 불안해졌다. 품이 조금 넉넉한 검정색 코트를 걸쳐 입고, 앞 코가 둥근 구두를 꺼내 신을 땐 조금 휘청이기까지 했다.



 오늘 그를 만나기로 한 곳은 데운 우유에 홍차를 끝내주게 우려내기로 유명한 카페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 홍차보다는 주로 당근 케잌을 먹으러 갔었다. 적당한 계피향과 달지도 않고 그렇다고 밍밍하지도 않은 당근 케잌을, 나는 나의 애인만큼 사랑한다.

 만약 오늘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나는 앞으로 그 곳의 당근 케잌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될까, 덜 사랑하게 될까? 그 카페에 발이나 들일 수는 있을까?

「잘 찾아왔네?」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몇 되지 않는 테이블을 용케 장악하고 앉아있던 그가 묻는다. 내가 사준 갈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모습이 오랜만이다. 헤어지게 되면, 저걸 벗고 가라고 해야 하나? 그럼 너무 치사 하겠지?라고 재빠르게 생각했지만. 내가 너무 치졸해보여서 관두기로 했다. 간장 종지도 나만큼 작진 않을 거야. 아마.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뭐...」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내게, 그는 「그건 그래」라며 대답한다. 곧이어 나오는 케잌과 -물론 당근케잌- 오리지널 밀크티 두 잔. 우리가 매번 시키던 메뉴. 그리고 이런 일상적인 선택에 뭔가 안도하게 되는 지금의 내 모습은, 슬프기도 그리고 조금 놀랍기도 하다.


「오늘 눈 온다던데.」
 케잌을 한 스쿱 크게 떠서 내 입에 넣어주며 그가 말한다.

「그걸 믿어?」
「믿어보는 거지. 기상청이 고생했을 테니.」
 이번엔 그가 케잌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우물거린다.

 「그래서 일부러 창문 쪽에 자리 잡고 있었어, 너랑 눈 오는 거 보려고. 저기 간판도 보이네.」


그가 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엔 ‘ㅅㄹㅅㄹ’라고 자음만 써 있는 카페의 간판이 걸려있다.

처음 여기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이 곳의 이름을 맞추는 내기를 했었다. 그는 ‘사랑사랑’아닐까? 라고 이야기했고 나는 아냐,‘시러시러’ 뭐 이런 걸 거야,라고 이야기했었다. 그는 그런 나를 너무 부정적이라며 나무랐고, 나는 그에게 이 카페 이름은 [실론살롱]이래 오빠도 틀렸어.라며 놀렸다.



 「오늘 예쁘네.」 그가 이야기한다. 나는 듣는다.
 「구두도 신었네.」 그가 또 이야기한다. 나는 내 발끝을 한 번 힐끗 바라본다.
 「말 안할 거야?」 그가 묻는다.
 나는 「하긴 할 거야. 그런데 지금 당장은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 기다려.」라고 대답한다.
 그 대답에, 그는 웃으며 「그동안 잘 지냈어?」라고 인사 한다. 나는 「오빠는?」하고 되묻는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대답이 없다.

 「케잌, 여전히 맛있네. 그치?」  
 「응. 여기는 진짜 최고야.」
 「여전히 이렇게 사소한 게 행복한 거라고 인정안하는 거야?」
 「오빠야 말로 언제까지 이야기 안 할 건데?」



퉁명스러운 대답만 해대는 나의 손을 그가 잡는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천천히 느리게, 집중해서 글씨를 쓴다. 처음엔 그가 내 손금을 따라 그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나 또한 그의 손끝에 집중한다. 그렇게 천천히 내 손바닥 위,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자 불안했던 마음이 풀렸다.




 「.....그냥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그는 이제 내 손바닥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로 「그건 내년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곤 「아... 이상하네. 친구가 가르쳐줬는데. 예쁘다고 하면 기분 풀릴 거라고. 이거 나름 필살기라고. 아, 예쁘면 다냐?!라고 말하라고 했었나?」

 그의 어이없는 이야기에 나는 픽-하고 웃는다.

 잘 배워왔네. 누가 가르쳐 준지는 몰라도.

「전처럼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지 않을래?」
이번엔 내가 먼저 다가간다.

「싫은데? 너는 일상 속 나의 소중함을 알아야 돼」 라고 짓궂게 말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내 머리위에 놓여있다.




나는 우리가 늘상 들렀던 이 곳에서 다시 일주일 전처럼 그에게 사랑받고 있고, 이제 그 사실에 안도한다.


 어느 새 창밖으로는 첫 눈이 내리고 있고, 그래서 나는 ‘가끔은 기상청을 한 번 믿어보는 것도 괜찮겠구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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