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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 Sep 16. 2021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10cm의 '스토커'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빛나는 누군갈 좋아하는 일에

기준이 있는 거라면

이해할 수 없지만 할 말 없는 걸

난 안경 쓴 샌님이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도 기준이, 자격이 있다면 할 말이 없다는 그. 나도 종종 어떤 "자격"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특히 그 "자격"은 쉬어야 할 때 내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내가 지금 쉴 자격이 있나. 내가 이런 거에 돈을 쓸 자격이 있나. 내가 이런 시간을 보낼 자격이 있나. 이런 "자격"에 대한 끊임없는 검증과 함께 미래에 대한 불안, 나에게 지워진 역할에 대한 책임감 등이 복합적으로 버무려져 나는 쉬는 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컸다. 쉬지 못하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올해 초 번아웃이 세게 왔고, 살기 위해 퇴사를 했지만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계속된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린 원인은 회사에 있다면서 지난 직장생활의 문제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변명 좀 그만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회사가 아무런 문제도 갖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결국엔 내가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약해 빠져서 지금 이 상태에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견디면서 이 악물면서 다니는데 왜 나는 나와버리고 마는거냐며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직장을 구하게 되더라도 내가 과연 잘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일까, 걱정이 앞섰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만난 책이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다. 이 책은 팟캐스트 '듣똑라'에서 번아웃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듣다가 알게 되어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고마움"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번아웃의 원인이 밖에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아니 같이 회사 욕을 해주는 가족이 있었지만 사실 내가 나 스스로에게 내 탓이라고 마음속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얘기들은 잘 들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안주연 원장님이 말해주는 이야기들은 번아웃의 원인이 명확하게 외부에 있다고 분명하게 말해주었기 떄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번아웃을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로 인한 증후군"으로 정의했어요. 



직무 스트레스가 번아웃의 원인이며,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고 방치한 조직 또는 기업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개인 단위를 넘어선 조직이나 사회, 국가 차원의 원인이 나오기 시작하면 오히려 무기력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번엔 달랐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조직이, 사회가 문제였구나! 다행이라며 슬며시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20대의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에너지도 많고,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해야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을 채워넣었는데,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나 했더니 회사가 문제였구나. 



포털사이트에 번아웃을 검색하면 "왜 연료 부족을 알리는 경고등이 켜졌는데도 계속 달리는가?"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 이처럼 불씨를 되살릴 역량마저 모두 써버려 피로의 정도가 심해지면 성취감을 넘어서서, 건강한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는 심한 무기력까지 느끼게 됩니다. 



번아웃을 만들지 않는 문화를 가진 조직이 우리나라에는 훨씬 적을텐데 다른 이들은 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 당장의 생활비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그 이외에 내가 다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들로 버텨내고 있는 것일테다. 문제는, 많은 이들이 번아웃 정도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쉴 수 없다보니, 자발적으로 멈춤을 선택한 이들이 곱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부모 세대가 우리 세대를 볼 때 "라떼는~"을 연발하게 되는 것도, 본인들이 견뎌냈던 시간들이 억울해서 그런 게 아닐까. 작가는 이러한 이들을 "피로의 자격을 따져온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주위의 말들이 성장 과정에서 누적되어 내가 나에게 자격을 따지는 사람이 되어버렸었다. 



우선 높은 직무 요구를 받는 것이 번아웃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직장에서 커다란 압박을 느낄 때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이른바 'A급 인재', 즉 일을 잘하는 사람이 번아웃에 빠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 일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는 업무의 책임을 어디까지 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맡아야 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책임지는지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 의사결정권이 없다는 사실에도 피로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맡은 직무에 한해 독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동시에 성과를 인정받고 그에 따른 보상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죠. 



혹시 번아웃이 온 분이라면, 사실 내가 촉망받으며 입사한 A급 인재라서 그런 건 아닐지 확인해보았으면 좋겠다. 이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번아웃이 온 것에 대해 억울하면서도 묘하게 기분이 좋기도 하다. 아... 하긴... 내가 좀 A급 인재이긴 하지... 이런 느낌이랄까? :)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직무 관여'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직무에서 소외되지 않고 관여할 여지가 있을 때 쓰이는 말이죠. 업무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든지, 개인의 의견을 낼 수 있다든지, 동료들의 지지가 있어서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감정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다든지 말이에요. 이럴 땐 반대의 효과를 내서 번아웃을 예방하거나 번아웃 증상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다녔던 직장의 입사동기A는 회사 생활이 힘들 때마다 자체적으로 "퇴사방지위원회"를 꾸려서 일대일 회동을 종종 갖곤 했다. 위원은 자기가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이성적인 조언을 줄 수 있는 사람, 따뜻하게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A가 똑똑한 거였다. 번아웃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멘탈이 튼튼한 인재를 선발한다 해도 번아웃을 근본적으로 막기는 힘듭니다. 번아웃을 예방하려면 근본 원인을 개선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번아웃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조직에 있기 때문이에요. 



맞다. 근본 원인인 조직을 고치지 않으면 누구나 언제나 번아웃이 올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정규직 채용공고는 물론이거니와 아르바이트 구인공고에서 "밝고 긍정적인 분, 에너지가 넘치고 적극적이신 분 우대"와 같은 문구를 종종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다. 대체 어떤 사람을 뽑아서 어떻게 굴리려고 그러는 건가. 상식적인 환경 속에서 함께 합을 맞춰나갈 일종의 파트너를 구하는 게 아니라 최대로 써먹고 다 소진되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려는, 그런 부품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피로가 쌓이면 주도성이나 적극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무언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사라지고,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기도 어려워지죠. 친구와 약속을 잡는 일도 무척 힘들어지고, 적극적인 대답도 회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카톡을 싫어했나보다. 카톡 답장하는 것도 힘들고, 잠깐 저녁 먹는 약속도 버겁고, 분명 힐링을 하러 떠난 친구와의 여행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엔 녹초가 되어 여행을 다녀온 건지 출장을 다녀온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 번아웃의 전조증상이었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감정이나 에너지에 기복이 있는게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항상 높은 수준의 감정적 레벨, 에너지 레벨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으면 에너지가 떨어지는 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기분이 나빠지는 걸 느낄 거예요. 에너지가 떨어지면 충전하면 되는데, 충전해야 하는 시기에 계속 자책하게 되잖아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요. 충전은 잘 안 되고 쉬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죠. 그래서 과로가 누적되는 경향을 보일 수 있습니다. 



쉬면서도 쉬지 못했던 이유는 자책감 때문이었으며, 그 자책감의 일부는 나와 내 가족의 경제적 기반 마련에 내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왔다. 어느 누구의 노후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지금, 내가 쉴 자격이 있나, 라고 물으면 내 마음의 답은 항상 '아니'였다. 다들 얼마 모았다고 하고, 결혼도 하고, 집도 사는데, 나는 그 중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쉬겠다고? 이런 내 마음을 작가도 읽었는지 이렇게 말한다. 



당위, 의무, 불안은 정확한 관찰을 가로막습니다. (...) 

번아웃이란 나에게 지속적인 사회적 의무와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침투한 상태에요. 



이러한 번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작가는 네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나의 오감에 기반한 관찰일기 쓰기, 셀프 토크를 하고 녹음해서 들어보기, 내 기분을 좋아지게 만들 응급 처방전 리스트 만들어두기, 연결되기. 다행히 세 번째 방법은 내가 노션에 정리해왔던 방법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는 이름으로 리스트를 만들어 놓았다. 누구에게 보여주기도 민망할 정도로 사소하다. 초코가 들어간 아이스크림 먹기, 10cm 노래 들으면서 집안일 하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시면서 버터프레첼 먹기, 가슴 따뜻해지는 드라마 보기 등... 아주 단기적인 효과를 낼지라도, 그 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 내가 번아웃 정도가 심해져 버텨내지 못하는 상황이 오지 않게 미연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이 책을 써준 작가님께 감사하다는 거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줘서,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줘서, 그게 작가님의 개인적인 의견만이 아니라 의학계에서도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고 공신력 있는 정보와 함께 말해줘서, 다시 조금씩 힘을 낼 수 있게 도와줘서. 번아웃이 세게 온 모든 분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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