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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 Sep 10. 2020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시간

영화 <아메리칸 셰프>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시간


영화 《아메리칸 셰프》의 주인공 칼 캐스퍼는 요리를 할 때 살아있음을 느낀다. 자신이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아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요리를 좋아하고 또 잘한다.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행운아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지시 아래에서 나다움과 주체성,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일해야 하는 시간이 그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한 개인이 자신의 인생에서 주도권을 잃는다는 것은 퍽 괴로운 일이다. 나 역시 지난 5년간 고용계약을 하고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일하면서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칼이 사장과 기싸움을 벌이다 결국 때려치우고야 마는 그 순간이 짜릿하고 통쾌했다.


"나는 뭘 하고 싶은 사람이었더라?" 직장인이라면 이 질문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루 9시간을 회사에서 머물며 회사가 설정한 목표를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넣는 시간이 계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분명 20살의 나, 25살의 나는 하고 싶은 것이 화수분처럼 샘솟던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상사가 휴가 갔으면, 오늘 일찍 집에 갔으면, 이런 일차원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시간을 파랑새를 쫓듯 찾아가지 않으면 언젠간 내가 저런 어른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수분과 영양분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툭 건드리면 바사삭 깨져버릴 듯한 복어 같은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스런 상상을 해본다. 


(출처: www.etsy.com (Illustration art prints by Giselle Dekel))



일의 의미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시간이 일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아직 그 경지까지 가보진 못했지만 주인공 칼은 일을 함으로써 나다워질 수 있는 수준에 있었다. 칼은 운이 좋게도 그럴 수 있었지만, 나는 쉽지 않을 듯싶다. 그렇다고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일을 만들겠다며 창업으로 돌아설 용기도, 자본도 없다. 그렇다면 나에게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소득을 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고 내가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하는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큰 방향성도 나와 맞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문제는 간사한 내 마음이 이러한 감사함을 자주 잊고 살아서 그렇지.


칼처럼 되고 싶은 욕심은 없다. 그 욕심을 채우려다 내 인생이 더 불행해질 것만 같아서다. 절대 잡힐 수 없는 무언가를 잡겠다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철없는 아빠같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이고 어떻게 만들 것인가.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내가 나다워질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인 것 같다. 내가 나를 속이면서 거짓부렁으로 글을 써 내려갈 수도 있지만 그런 글쓰기는 스스로도 재미가 없을뿐더러 오래가지 못하고 매력적이지도 못하다. 계속해서 쓰다 보면 결국 내 솔직한 감정들과 마주하게 되고 어지럽게 부유했던 잡생각들은 언어화되어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제자리를 찾아 서랍 속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그 순간 나의 느낌, 생각, 깨달음, 번뇌, 고통, 성장의 찰나가 비눗방울처럼 얼마간 둥둥 떠다니다 순식간에 톡! 터지며 사라지고 만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출처: www.pinterest.co.kr/pin/597501075555315789)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존재, 내가 힘이 되어주는 존재

칼에게는 힘이 되어 주는 존재가 많다. 퍼시, 이네즈, 몰리, 마빈, 마틴, 램지. 동시에 그들에게 칼이 힘이 되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칼이 그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고, 퇴사해 푸드 드럭을 하고, 장사가 성공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의 주변에 그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이들이 있어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왜 나도 그럴 때가 많다. 혼자 있을 때에는 세상 귀찮고 무기력하고 의지가 쭉쭉 떨어져 결국 누워서 유튜브를 보는 것을 선택하고 마는데,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옆에 있을 때에는 혼자서는 용기내기 쉽지 않았던 행동들을 훨씬 적은 양의 용기를 가지고도 시도해볼 수 있게 된다. 신기한 일이다. 


칼이 인생의 힘든 시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그가 그들에게 힘을 주는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돌고 돌아 다시 그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다면 푸드트럭을 도와주겠다고 일류 레스토랑의 부셰프를 때려치고 달려오겠는가. 삶에서 잃지 말아야 할 기조가 무엇이어야 할지, 그를 보며 배웠다. 돈에 대한 욕심이나 명예를 향한 갈구가 아닌 사랑. 사랑이 사람을 살게 만든다. 


(출처: www.yesmagazine.org/health-happiness/2019/12/31/repair-relationships-apology/)



요리의 힘

누군가 해준 요리는 힘이 세다. 자취를 하다가 문득 엄마집에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엄마의 안부가 걱정되거나, 엄마가 해준 밥이 먹고 싶거나. 엄마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마주친 엄마 얼굴이 괜찮아 보이면 일단 마음에 있던 조금 묵직했던 바위가 주먹만 한 돌로 줄어든다. 다행스런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으면 엄마는 어느새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고기 있는데 고기 구워줄까? 아님 고등어조림? 아님 닭 삶아줄까? 닭볶음탕?" 엄마는 배워본 적도 없는 랩을 하듯 뭘 해주면 좋을지 메뉴를 줄줄이 읊는다. 메뉴는 뭐래도 상관없다. 엄마가 해준 거라면. 엄마가 해준 달짝지근한 고등어조림에 막 지은 현미밥을 한 그릇 하고도 반 공기 더 먹고 나면 배만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어딘가에 공허하게 내버려져 있었던 공간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도 사랑이었겠지. 


타버린 샌드위치를 손님에게 주려고 하는 아들에게 칼이 칼이 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내 인생의 좋은 일들은 다 이 일 덕에 생겼어. 
내가 뭐든지 잘하는 건 아니야. 난 완벽하지 않아.
완벽한 남편도 아니고 미안하지만 최고의 아빠도 아니었어. 하지만 이건 잘해.
그래서 이걸 너와 나누고 싶고 내가 깨달은 걸 가르치고 싶어. 
요리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나도 거기서 힘을 얻어. 너도 해 보면 빠지게 될 거야. 
이래도 그 샌드위치 손님 줘야 할까? 
- 영화 '아메리칸 셰프' 중 - 


요리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거기서 또 힘을 얻는다는 말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요리를 대하는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이 그를 수호신처럼 감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날 불편할 만큼 자극적인 먹방이 넘쳐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리는 우리가 언제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속 고향과 같은 것이 아닐까. 언젠가 말한 적이 있다. 나의 꿈은 된장찌개를 맛있게 끓이는 할머니가 되는 거라고. 삶의 골짜기에서 지치고 힘든 누구든지 나를 찾아왔을 때, 고슬고슬한 현미밥에 걸쭉할 만큼 진한 된장찌개를 한 상 차려주는 할머니. 그런 푸근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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