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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 Oct 06. 2021

일상이라는 원심력의 무서움

책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다음 주부터 새로운 직장에 출근합니다. 무작정 퇴사 후 4개월이 흘렀습니다. 죽을 것 같이 힘들어서 다시는 급여생활자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계획 없는 다짐과 함께 퇴사했지만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다시 구직시장으로 돌아와 수많은 서류 탈락, 면접 탈락을 마주하며 절망과 막막함을 느꼈던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다시 직장에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면 제발 취업 좀 되라며 간절히 바랬던 취준생 시절의 절박함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일상이라는 원심력에 의해 직장에 대한 불만과 또 다른 무언가에 대한 갈증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을 갖다가도 어느 순간 일상이라는 원심력에 의해 습관처럼 같은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면 한심하기도 하고 원래 인간은 이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랜만에 취준 기간 동안 발길을 뚝 끊었던 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부동산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재테크 쪽 서가에서 서성이다 두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빌리자니 약간 숨 막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돈은 너무 중요하지만 너무 돈만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힐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신간이 비치된 책장으로 갔습니다.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새 책의 빳빳한 종이를 넘길 때의 기분이 좋아 도서관 신간 책장을 항상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책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를 빌려왔습니다. 


백혈병 투병, 완치, 재발, 재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투병 생활을 이어오며 담담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였습니다. 저는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크게 아파본 적이 없어서 3번의 암 투병을 하고 나면 인생의 가치관이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일상이라는 원심력이 너무 강해 완치되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자꾸만 병에 걸리기 이전의 욕심과 마음들이 다시 되살아난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대체 일상이라는 것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일까요. 


일전에 봤던 애니메이션 '소울'이 생각났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룬 다음에 뭘 하면 하면 되냐는 주인공의 물음과 매일 이곳에 와서 연주를 하면 된다는 답변. 행복이라는 건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고, 그 과정이 곧 일상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던 영화였습니다. 누가 뭐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꿈을 이루고 나서도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죽을 것만 같았던 병을 치료하고 나서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어떤 변화를 바라든, 기대하는 감정이 있든, 결정적인 순간이나 계기가 오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에서" 하면 된다는 가르침을 두 작품 모두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 내 주변 사람을 더욱 챙기는 일, 하루하루에 감사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만드는 일, 건강을 잘 보살피는 일, 목표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 자체로 즐기는 일, 기타 등등. 당연하지만 사실 실천하기 쉽지 않다는 걸 잘 아는 것들. 하지만 지금 당장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그게 실현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어깨 넘어 배웠습니다. 오늘부터 감사하고 오늘부터 충실히 임하고 오늘부터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언행으로서 알림을 보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소울' 관람 이후 다시 일상의 원심력에 이끌려버린 제가 황승택 작가님에 의해 다시 오늘의 소중함을 상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 中 


저는 제 글이 독자들에게 작은 물수제비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책을 읽는 분들의 가슴에 단 한 번이라도 작은 파문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일하다 쓰러진 모든 직장인들에게는 자기 관리의 실패자라는 차가운 시선보다 이해와 배려를 담은 따뜻한 응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처럼 정부가 각종 대책을 쏟아 내도 정책 수혜자가 만족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요자의 정확한 요구를 파악하고 반영하지 못하는 구조 때문일 것입니다. 각종 정책을 세울 때 외부 전시효과나 단기적 수익 대신 정책 수혜자의 시급한 요구각 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래를 위해 누군가를 훈련시키지 않으면 피해는 모두의 몫이 된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최고의 의사를 만나려면 본인도 최고의 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환자가 자신의 질병을 공부하고 궁금증을 적극적으로 담당 의사에게 묻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환자와 의사는 신뢰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환자가 긍정적 의지를 품고 담당 의사의 치료법을 따를 때 치료 효과도 가장 좋을 겁니다. 환자와 의사의 신뢰라는 핵심 전제가 빠진다면 세계 최고 클리닉의 의사가 와도 효과적인 치료는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병이 제게 준 사색과 경험은 오롯이 제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 책의 인세 100퍼센트를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기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 역시 입원하면서 정말 힘든 기간을 보내고 난 후 가치관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미래를 위해 현재를 무작정 희생하지 말자'라는 추상적 구호를 일상생활에 이식하기로 한 겁니다. 아마 재발이 없었더라면 일상이라는 정교한 망각제에 빠져 여전히 같은 생활을 했을 것 같습니다. 충실한 가장, 성실한 기자이자 조직원, 내 집 마련을 목표로 한 알뜰한 소비 등등 사회가 요구하는 모범적 모델을 벗어나기 어려웠겠죠. (...) 앞으로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10년 뒤의 보상, 타인의 인정보다 진정 제가 행복할 수 있는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려고 합니다. 제가 행복해야 아내를 더 사랑하고 제 딸들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사회, 주변 환경이 안정적인 길을 가라고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현실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지 않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헛똑똑이가 된다는 말을 좀 거칠고 직설적으로 했다고 이해해 줘. 


공부 중독에서 벗어나 다른 트랙에 선 사람이 늘어날수록 공부라는 블랙홀의 중력장은 힘을 잃을 것이다. 차곡차곡 쌓여서 임계점을 넘어설 정도의 참여자가 모이고 나면, 블랙홀은 그 위력을 잃고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분들이 담아 갔으면 하는 것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잠시나마 돌아보는 여유입니다. 저는 비록 백혈병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반강제적으로 제 삶을 복습했지만 독자 여러분은 책을 덮고 나서 자연스럽게 인생 좌표를 점검해보고 자신만의 다짐을 만드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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