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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May 03. 2022

소유, 사물에 내 이름표를 붙이는 일

2021-08-27 에 쓴 일기

    살면서 수많은 물건들이 우리 곁에 머무르다 사라진다. 설령 지금 함께하더라도 또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 사라졌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그러하도록 만드는 주범은 나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버려지는 쪽에 가깝다.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수명이 다해서 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주인의 싫증과 무관심에 일방적으로 이별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무엇이 버려지고 무엇은 오래 살아남을까? 떠올려보면 적어도 비싸게 주고 산 건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바꾸어 말해 싸게 산 건 비교적 버리는데 미련이 적다. 특별한 의미가 담긴 물건이 아닌 이상 폐기여부에 관한 의사결정은 일반적으로 가격에 민감한 법이다.   


    돈은 물건에 내 이름표를 붙여 주기 위해 필요한 '물건'이다. 그러므로 돈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적인 과제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비를 요구케 하고 소비를 위해서는 단연코 돈이 필요하다. 


    경제학에서 수요와 공급이 교차하는 지점, 즉 '보이지 않는 손'이라 정의되는 가격은 시장에서 표면적으로 합의된 물건의 가치다. 책정된 가격만큼 돈을 지불해야 비로소 내 것으로서 손에 쥘 수 있다. 지불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한 대가만큼 그 물건의 소중함에 대한 경중이 차별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런 면에서 어느정도 합리적이다.


    실제로 가격이 비싼 물건들은 정 쓸모가 없어지면 당근마켓이나 중고나라에 등장한다. 쓰레기로 혹은 분리수거로 그냥 버려 버리기엔 구매하기 위해 썼던 돈이 아까우니 중고거래를 통해 조금이라도 지불했던 금액을 회수하고자 한다. 덕분에 물건의 수명은 다른 주인을 만나 가까스로 연장된다. 


    중고거래에서도 보통 비싼 물건이 환대 받는다. 예컨대 샤넬가방은 기꺼이 중고로 구매하지만 중저가 브랜드의 가방이라면 그 모델이 단종되거나 한정판이라는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돈을 좀 더 보태어 중고상품 대신 새상품을 사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 최초의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으니 할인율이 높아도 새것과 중고의 절대적인 금액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퇴사를 하면서 가구를 대대적으로 교체했다. 회사에 출근해 있었던 하루의 상당 시간을 앞으론 집에서 보내게 될 것이니 집안에서의 경험이 이전보다 중요해질 것이었다. 저렴한 2인용 오렌지색 소파와 인터넷으로 구매했던 흰색 테이블램프, 다이소 수납장 등 조악한 가구들을 내놓기로 했다. 혹시 누군가에겐 필요할 수도 있을까 싶어 당근마켓에 중고거래와 무료나눔 글을 올려보았지만 끝내 아무도 데려가지 않았다. 비교적 유명브랜드 상품이나 비싼 제품들은 빠르게 거래가 성사되는 것에 반해 저렴한 물건들은 세상으로부터 쉽게 버림받는다. 


    개인적으로는 손길이 닿았던 것에 애착을 느끼는 편이라 더 이상 필요가 없어도 무얼 잘 버리지 못하고 처분하는 과정이 내내 섭섭하다. 다수의 물건들을 떠나보내며 아쉬움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버린다는 것이 곧 쓰레기를 양산하는 환경파괴적인 행위로서 다가오는 죄책감에도 굉장히 마음이 괴로웠다. 이 물건을 왜 샀을까? 한탄과 후회로 시작하여 내게 이런 물건도 있었나? 잊고 지냈던 존재의 발견까지 자각하지 않고 행했던 무분별한 소비를 진심으로 반성했다. 


    지금은 꼭 필요한 것만 구매하려고 노력한다. 대충 쓰고 버리자는 마음으로 저렴한 걸 고르기보단 두고두고 오래 쓰자는 마음으로 비싸더라도 좋은 걸 산다. 그래야 혹여 나중에 내 손을 떠나더라도 세상에 외면 받지 않고 물건의 예상수명이 연장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환경에도 덜 미안해진다.


    이런 결심을 하고 처음으로 구입해서 지금까지도 구매만족도가 매우 높은 물건이 있다. 누군가 의미 있는 물건을 꼽으라면 항상 머릿속에 순위권으로 떠오른다. 프리츠한센의 카이저이델 플로어램프다. 애칭은 까망이다.


    평소 형광등보단 스탠드에 의존해 생활한다. 날이 어두워져도 웬만해선 등을 켜지 않는다. 특히 주위를 새하얗게 밝히는 주광색은 되도록 피하고 보자는 근거 없는 의지가 강해 빛이라고 하면 최대한 전구색에 의지한다. 가정집에서는 주로 천장등은 주광색을, 스탠드는 전구색을 많이 사용하는데 아마도 앞서 언급한 생활 패턴은 이 점에서 기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대낮을 제외하곤 플로어스탠드를 거의 하루종일 켜 놓는다. 집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는 사물을 고르라면 플로어스탠드가 1위를 독주한다. 공부할 때는 침실에서 거실로 잠잘 시간엔 거실에서 침실로 어디를 가든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닌다. 취향을 깨닫고나서 ‘제대로 된’ 플로어스탠드를 사서 오래도록 사용하고 싶어졌다. 이전까지 사용했던 저렴한 스탠드는 갓등이 불안정해서 삐걱거리거나 바닥이 평평하지 못해 흔들거리거나 종이갓이 얼룩지는 등 내구성면에서나 심미적인 측면에서 모두 부족했다. 


    대체할 후보로는 루이스폴센 제품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지금의 소장품은 매장에서 거의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에 가깝다. 프리츠한센에 의자를 보러 갔었다. 역시나 프리츠한센은 조명보다는 소파와 의자나 식탁같은 가구가 유명한 브랜드라서 조명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소파 옆에 서있던 플로어스탠드가 눈에 들어왔다. 심플한 디자인이라 그런지 가벼웠다. 가벼운 무게는 중요했다. 집안 곳곳으로 이리저리 들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카이저이델 플로어램프는 디자인이 그리 인상적이지도 존재감이 뛰어나지도 않아 거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도 대부분이 이케아 제품이겠거니 생각하는 것 같다. 그보단 비싼 돈을 주고 구입했으니 그저 혼자만 설렌다는 안타까운 면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에게 다가오는 물건의 매력은 도통 줄어들질 않는다. 


    이 램프는 크리스티안 델이라는 디자이너가 1930년대에 선보인 제품이다. 당시 기존의 플로어스탠드와 완전히 다른 혁신적이고 선구적인 디자인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후 현재까지도 유효한 대중적인 디자인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지금 봐도 여전히 모던하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근 백 년 전에 이 물건이 얼마나 파격적으로 여겨졌을지를 상상해보게 한다.


    시중에 디자인 카피품이 흔하지만 오리지널만의 구별되는 특징은 스탠드 본체가 앞뒤로 15도 가량 기울여진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상품 카탈로그에는 곧게 서있기 보다는 앞뒤로 기울여 연출하는 컷이 많다. 내 경우에도 앞쪽으로 기울여 사용하는 일이 잦은데 특히 밤에 혼자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본체를 앞쪽으로 기울이면 마치 친구가 옆에서 고개를 내 쪽으로 갸우뚱하고 같이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걸 바라 봐주는 기분이 들어 외롭지 않다.


     카이저이델 플로어램프는 화이트와 블랙, 각각 매트와 글로시 타입의 네가지 대표적인 색상이 있는데 나는 최초에 화이트 글로시 컬러를 구매하려고 했었다. 블랙보단 화이트가 무난해 보였다. 그런데 매장 직원이 무조건 글로시 블랙으로 사야한다고 조언했다. 크리스티안 벨이 처음으로 이 모델을 발표할 때는 글로시 블랙만이 유일한 컬러였으니 오리지널을 염두하고 색상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보니 주저없이 글로시 블랙으로 주문하게 되었는데 점원의 말을 듣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매장에 들르지 않고 조금이라도 금액을 아끼고자 온라인으로 구매했다면 하마터면 화이트 글로시를 택했을텐데 이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다. 이에 안도하며 오프라인 가격과 온라인 가격의 마진 차이가 이런 팁을 준 점원의 월급으로 역할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연히 마주친 플로어램프를 운명처럼 맞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물건을 통틀어 가장 친한 단짝친구로 여기고 있다. 물론 인생의 끝까지 함께할 예정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처럼 좋은 물건을 만나서 가까이에 두고 지속적으로 만족스러움을 느끼는 것 역시 삶의 큰 축복인 것 같다. 혹시 램프가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해할까.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까망이는 내 옆에 서서 빛을 비춰주고 있다.


작업실을 비춰주는 까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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