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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욱 Apr 07. 2024

목련

얼마 전 회사 동료들과 좋은 일로 와인을 한 잔 마시며 나는 이번 봄이 내 생의 마지막 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 망상은 그저 지금을 열심히 살아내자는 일종의 취중다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이 정말 나의 마지막 봄이어서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면 분명 중간에서 조금 위쯤에 ‘화창한 아침 햇볕에 빛나는 목련 만나기’가 한 줄을 차지했을 것이다.


주말에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도통 카메라를 들고나갈 수 없는 처지라 그럴 바엔 애저녁에 단념하고 차라리 그리워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집 앞 아파트 관리사무소 앞의 매화, 올해도 연이 닿지 않을까 싶었는데 늦은 밤 퇴근길 며칠 차이로 허무하게 꽃잎이 지는 걸 바라보며 결국 세상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감했다. 만날 운명이었으니 만났겠지만, 하나의 우연이 덜 겹쳐 허무하게 이별하고, 우습게도 여름이 되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겠지. 그래도 아직 남은 봄을 핑계 삼아 모르는 척 살며시 서로 손끝이라도 스치는 날이 하루 정도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매년 인스타그램 피드에 목련 사진을 올릴 때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내 봄의 주인공은 벚꽃이 아니라 목련이다. 달항아리 백자같이 둥글고 하얀 꽃잎이 목련 꽃의 자태는 함께 봄을 지나는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년 12월부터 나는 매일 운이 좋다. 그 운을 로또를 사는데 쓰지 않고 잘 모아둔 덕분일까, 마침 주말인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목련 나무를 찾았는데 잠깐 구름 사이로 해가 나와 눈이 부시게 빛나는 백목련을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처음 본 이 집의 목련 나무를 제대로 담고 싶어 틸트 시프트 렌즈를 샀다. 2017년에 촬영한 종묘 정전의 설경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거진 한 달치 월급을 들여 시그마 광각 렌즈를 샀던 것처럼. 사실 기껏 해봐야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건 괜찮은 카메라와 렌즈 따위 정도다. 햇볕과 적당한 비와 바람, 심지어 나무와 어울리는 담장과 집 무엇 하나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일 년간 나무를 잘 돌봐준 집주인분께 담장 너머로 계속 감사할 뿐. 살아보니 무언가 온전히 나 혼자 해냈다는 말만큼 오만한 말도 없는 것 같다.


한 그루의 나무에서도 볕을 조금 더 받아 먼저 꽃을 피우는 가지가 있어 그 꽃잎을 먼저 떨구기에 목련은 만개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나무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 더 귀하다. 목련은 잎이 조금만 시들어도 금방 티가 나는 솔직한 꽃이다. 이정재와 전지현이 주연한 영화 '시월애'의 기침과 가난과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대사처럼 목련과 나 사이에 어긋난 시간 또한 숨길 수 없다. 오늘 아침 겹쳐진 시간만큼은 아직 잎이 떨어지지 않은 목련 한송이가 다이아몬드 한 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목련씨에게 떠나기 전에 한번 안아달라고 부탁했다. 포옹을 하기엔 너무 큰길 위의 이른 아침이지만, 그럼에도 품에 안기니 사위는 폭신한 목련향으로 가득해 마음까지 고요하다. 이렇게 이번 봄과도 이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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