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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욱 Aug 25. 2024

창덕궁∙昌德宮 / 여름∙夏

CHANGDEOKGUNG ROYAL PALACE / SUMMER

처음 올라본 주합루 권역


티켓팅에 영 소질 없는 사람인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운 좋게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에서 진행하는 '무언자적(無言自適), 왕의 아침 정원을 거닐다' 창덕궁 아침 산책 프로그램 (무려) 토요일 티켓 예매에 성공했다. 아침 7시 30분부터 9시까지 약 1시간 30분 동안 후원 일부 권역을 자유롭게 산책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여름 아침 이른 시간 궁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 보니 귀한 풍경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주합루 앞에서 내려다본 후원 부용지 일원의 아침 풍광, 좌측의 영화당, 중앙의 어수문 기와가 아름답다


그냥 혼자 산책하는 프로그램이라 생각하고 입장했는데 창덕궁 관리소에서는 동선 각 구역별로 많은 직원분들이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 참가자들에게 프로그램을 상세히 안내해 주고 도와주셨다. 돈화문 앞에서 티켓 확인을 한 후 평소 후원의 출구로 사용하는 궐내각사 옆의 길로 올라가 향나무 숲길을 짧게 산책하며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놀랍게도 이동 중에 주합루 권역을 방문할 수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은 너무나도 특별한 추억이 될 수밖에 없었고 티켓값 1만 원이 너무 싼 게 아닌가 미안할 정도였다.


더운 날씨에 주합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남 문화재 해설사분이 간단한 설명 후 참가 기념엽서를 나눠주시고 약 15분 정도 주합루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자유시간을 가졌는데 처음 보는 풍경에 몸과 마음이 바빴다. 예전에 배병우 작가님의 창덕궁 사진집에서 봤던 구도가 떠올라 어설프게나마 흉내도 내볼 수 있었다. 아마도 내 평생 이런 기회가 다시 오기 쉽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기에 1분 1초가 너무나도 기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주합루에서 바로 부용지로 내려와 남은 관람시간 동안 부용지와 애련지 일대를 산책할 수 있었다. 곳곳에 관람객들이 앉아서 풍경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의자를 비치해 놓았는데 접이식 캠핑의자여서 창덕궁 후원 공간에는 잘 맞지 않았다. 차라리 등받이 없는 작은 나무의자 정도였으면 프로그램의 취지와 공간과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영화당 옆 느티나무 아래에선 직원분이 테이블까지 펼쳐놓고 친절하게 시원한 두 종류의 전통차를 나눠주셨다. 종이컵에 담긴 오미자차를 한 모금 마시니 아침 더위가 한결 가시는 듯했다.


주합루의 기둥과 어수문 지붕, 부용지 일원의 울창한 여름 숲
주합루 뒤편의 모습, 좀 더 잘 담아보고 싶었으나 사람은 많고 마음만 급했다



변화의 시대, 더욱 그리운 옛 모습


본질에는 변함이 없으나 여러모로 아쉬운 설치물 (2024년 8월 촬영)
계단이 설치되기 전의 영화당 풍경 (2017년 6월 촬영)


무언자적 프로그램 외적인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영화당에 새롭게 설치된 데크목 계단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석조계단의 유지보수를 위해 임시로 덮어 놓은 건가 싶었는데 근처의 창덕궁 직원분과 이야기해 보니 올해 상반기에 설치된 교통약자를 위한 설치물이라고 한다. (여전히 석조계단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덮개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교통약자와 고령의 관람객이  위한 목적이었겠지만, 어울리지 않는 계단으로 인해 영화당은 멋진 현판 글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드라마 세트장 같은 느낌의 건물이 되어버렸다. 한번 저렇게 설치된 시설물은 다시 철거하기 쉽지 않기에 영화당의 맵시 있고 날렵한 원형은 이제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사고 방지의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영화당 내부 관람객 출입을 좀 더 제한하고 석조 계단 아래에서 건물을 바라보며 원형이 간직한 아름다움을 동경하게 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날도 아침부터 영화당에 신발을 벗고 올라 마루에 등을 대고 누워있는 관람객들의 행동은 왕의 정원이란 공간의 품격에도 맞지 않고, 자유롭기보단 방만하고 게을러보일 뿐이었다. 내 눈에는 왕릉에서 직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발을 벗고 맨발 걷기를 하는 뻔뻔한 관람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궁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시대도 변하나 보다. 예전과 달라진 모습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엔 시간이 필요하다. 아침 일찍 주합루 권역에서 부용지를 내려다보며 만약 지금 이 순간이 2018년의 그 비 오는 가을이었다면, 혹은 2014년의 그 겨울이었다면 상상했으나 그 지나간 아름다움은 부질없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나가는 게 중요하다. 결국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마음에 새겨진 한 장을 따라가지 못한다. 나는 자랑할 것도 없거니와 그렇게 깊이 있고 대단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아니기에 그냥 나 스스로 목표한 길이나 무사히 끝까지 걸을 수 있음 다행이겠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기엔 이젠 내 나이가 너무 많아졌다.


오랜만에 찾은 창덕궁은 여전히 푸르고 아름답다. 어찌 보면 남들보다 조금 일찍 고궁이 가진 아름다움에 매료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조금이라도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을 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음에 스스로를 위로한다. 무엇보다 좋은 프로그램을 기획해 주시고 더운 날씨에도 아침 일찍 출근해 현장을 운영해 주신 창덕궁 관리사무소의 주무관님과 문화재 해설사분들, 그리고 직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불로문 일원의 여름 아침 풍광
애련지 옆의 두 갈래 소나무, 한쪽은 가지가 부러졌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하다
녹음이 짙어진 연경당 일원의 풍경, 가을이 기대된다
금마문 옆의 단풍나무는 밑동만 남았다. 그 위로 무성하게 피어난 꽃과 풀들이 시간이 흘렀다고 말해준다
사정비기각 일원의 풍경,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여름 더위를 씻어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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