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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라노 Oct 12. 2022

못난 년, 애도 제대로 못 봐?

길러주실 거 아니면, 비난도 하지 마세요.

한 4년 전에 홈플러스에서 발생한 실화 사건이다! 이제 돌이 막 지난 큰 애를 유모차에 태우고 남편과 기저귀랑 이유식 재료를 사면서 지하 1층을 한 바퀴 돌았다. 토요일 오전이었던 것 같은데, 더 걷기 싫을 정도로 피곤했었다. 주중에 열심히 회사일 하느라, 그리고 안 해보던 살림에 적응하느라, 배워본 적 없는 육아를 해보느라 힘들었다. 고3 때보다, 변호사시험 준비할 때보다, 큰 병으로 수술을 받았을 때보다 더!


아이 속옷을 사러 모이몰론 가게 앞을 지날 때였다.

"여보, 표정이 너무 안 좋다. 여기서 잠깐 애기 내의 보고 있으면 내가 바닐라라사 올게. 단 거 먹고 기운 내자, 응?"

남편이 사려 깊게도, 달달한 커피를 수혈해 주겠다고 나섰다.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사 온 커피를 마시며, 아이 옷 가게를 몇 개 돌아보려던 참이었다. 큰 애가 갑자기 커피를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일전에 친정아빠가 큰애한테 달콤한 커피를 한 번 맛보게 해 준 적이 있는데, 그때의 강렬한 기억이 떠올랐나 보다. 이제 돌쟁이 아이에게 커피를 주기는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아서, 달래도 보다가, 윽박도 질러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신랑아, 랑이가 애기 잠깐만 안아주라."

어쩔 수 없이 SOS를 쳤는데, 갑자기 옷 가게 모퉁이에 있던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지지리도 못난 년, 애도 하나 안 울게 제대로 못 봐?"

그 아주머니 근처에는 우리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우는 아이를 데리고 있 '못난 년' 후보는 나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아주머니를 응시했다. 한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셨다. 순간 움찔, 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내 눈에 뭔가 분노, 억울함 같은 것이 가득했나 보다. 아주머니는 내 시선을 피한 채, 가판대의 물품을 뒤적거리셨다.


거기서 상황이 끝났는데, 내 안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더 뭐라고 나를 비난해 주지, 왜 멈추시는 거야! 나 지금 싸우고 싶은데!' '제발 싸움을 걸어줘. 나 지금 정말 할 말 많고, 싸우고 싶고, 싸워서 이길 수 있단 말이야' 같은 못난 목소리가.


'지금 저에게 못난 년이라고 하셨나요? 아주머니에게 '못난 년'의 정의가 뭔지 모르겠지만, 저 제 밥벌이하고, 아이 서투르지만 열심히 잘 기르고 있고, 지금 제 앞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요? 길러주실 거 아니면 비난도 하지 마세요.' 어디 쓸 데도 없는 반론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눈치 빠른 남편이 나를 살살 달랬다. "옛날 어른들 다 그러시잖아, 나쁜 뜻은 없으셨을 거야."라고. 나도 안다. 별 뜻이야 있으셨겠는가. 돌쟁이 아가가 울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러셨을지도, 예전 본인이 육아하셨을 때 생각이 나셔서 그러셨을지도 모른다. 뭐, 나에게 개인적인 악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으리라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분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기분이 나빴다. 내가 회사 근처에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걸고 있었다면, 내 옆에 후배가 울든 말든, "지지리도 못난 년"이라는 소리를 들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아기 엄마'니까 함부로 반말을 해도 되고, 멋대로 충고를 해도 되는 대상이라고 판단한 게 아닐까. 그 나이대 아주머니들에게는 아이를 키우는 일은 엄마라면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잘해야 하는 일이라고들 생각하니까. 하지만 '못난 년' '왜 못하냐' 등등의 말이 엄마에게 어떤 동기부여도 되지 않고, 무기력함과 자책감만 쌓이게 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요즘 애기 엄마들, 며느리들은 살림도 제대로 못 배우고, 육아도 경험해보지 못하고, 갑자기 엄마가 되는 경우도 많다. 안 그래도 낯선 업무, 자신 없는 업무를 받아서 힘든데 비난하지 말고 격려의 말을 해주면 좋겠다. 지금 만약 그때로 돌아가서, 그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게 된다면.. 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도 서툴지만 애쓰고 있어요. 잘 기르려고 노력하는 데, 비난보다는 응원을 해주세요."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못하고 안 하던 살림에 하나씩 도전하고, 아들에게 매번 거절당하면서 이유식도 열심히 만들던 몇 년 전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힝. 진짜 애 많이 썼어. 몇 년 지나니까 지금은 모든 것이 훨씬 나아졌어. 이유식도 안 만들어도 되고. 너 살림도 진짜 많이 늘었다? 요새는 회사일 집중해서 하는 요령도 생겼고, 이렇게 밤에 브런치도 쓸 수 있게 되었어. 열심히 살아준 네 덕분이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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