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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듀잉 Jan 23. 2024

안되던 노래가 갑자기 잘 불러질 때

그 짜릿함에 대하여

나를 뺀 모두의 눈동자가 바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구나. 


부부동반 모임에서 다들 어느 정도 취기가 올랐다. 노래방에 가서 좀 더 제대로 놀아보고 싶은 눈치다. 음주가무를 워낙 사랑하는 남편은 술김에 밀어붙였다가 다음날 괜찮을지 자신의 운명을 가늠하느라 바빠 보인다. 남편의 직장 동료인 형은 이미 어깨춤을 덩실대며 한 편으로는 “제수씨만 괜찮다면…”이라고 말끝을 흐린다. 곤란한 듯 웃는 언니의 눈빛에도 기대감이 한껏 어려 있으니 결국 노래방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저녁 초대를 받은 일주일 전부터 이미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차인데 갑자기 노래방까지 가야 하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다. 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호탕하게 웃으며 술에 취해 노래방에 가본 적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없다.


웃으며 손사래 치다가 못 이긴 척 따라가서 탬버린이나 열심히 흔들면 되지 않을까? 그러기엔 노래방은 나의 오랜 고민, 걱정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분위기에 떠밀려 “너도 한 곡 불러”라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모두의 흥을 깨뜨리는 것 같은 책임감이 밀려와 식은땀이 난다. 부부는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아기가 있어 그동안 밤에 둘이서만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늘 만약 노래방에 간다면’ 1년 만일 것이라는 그들의 은은한 어필에 나는 결국 굴복했다.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노래를 잘 못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내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잘 부르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감성으로 벅찬 내 마음과는 달리 바람 빠진 풍선의 속삭임 같이 힘없는 가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좀 잘 불러보려고 하면 혀와 입천장이 딱 달라붙은 것처럼 좁고 갑갑한 소리로 헐떡이게 되니 참으로 답답했다. 


자연스러운 내 목소리로 편안하게 말하고 노래 부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한 긴장을 내려놓고 싶다. 말해야 한다는 강박 없이 하고 싶은 만큼만 이야기하고, 노래를 즐길 수 있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자신감을 북돋아 주거나 긴장을 낮춰주는 여러 영상이나 책들도 탐닉해 보았지만 큰 설득력이 없었다. 진짜 내 피부와 근육으로 느끼고 와닿아야 비로소 납득하고 이 부자연스러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취미 차, 치유 차 선택한 것이 바로 보컬, 발성 레슨이었다. 그렇게 취미라는 가벼운 동기로 포장하여 나의 오래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뗐다. 


노래와 발성에 관한 실용적인 비법이나 화려한 테크닉을 논할 수 있는 단계조차 아니었다.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대로 긴장을 이완시키고 편안하게 호흡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간절한 일일수록 절박하게 매달리는 나였기에 이번만큼은 힘을 빼고 꾸준히 다니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목을 조이지 않고 편안하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쨍하게 갈라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쉬운 노래 1절을 불러보는 등 작은 단계들을 배워 나가다 보니 어느덧 네다섯 달이 흘렀다. 




남편의 직장동료 부부와 어색하게 들어선 노래연습장. 

드디어 내가 조금 나아졌는지 확인할 기회가 왔다. 



탁자 위에는 생수와 맥주 캔, 과자 봉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름모 꼴의 테이블 위로 정중히 노래 검색용 리모컨이 오간다. 아나운서로 활동했던 언니의 목소리는 울림 자체부터 어마어마했다. 가수 거미와 장혜진을 넘나드는 구성지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형은 랩과 노래를 자유롭게 오가며 여자 가수 노래도 거침없이 소화한다. 남편도 부르기 힘들기로 유명한 노래를 열성적으로 부르며 목에 핏대를 세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제 정말 나도 한 곡 불러야 할 때다. 내가 노래방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일단 들어온 이상 한 곡도 부르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 


지금 내가 유일하게 믿는 구석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다닌 보컬 레슨뿐이었다. 사실 선생님은 진작 이제 노래방에서 노래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몇 달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내 문제가 그렇게 쉽게 해결될 리 없는데 너무 이르게 도전했다 금방 실망하게 될까 겁이 났다. 목소리에 힘이 생기고 말을 더듬는 횟수가 줄어든 것은 감지하고 있었지만, 노래는 또 다른 영역이었으니까. 


용기를 내서 아이유의 <가을 아침> 첫 소절을 불러보았다. 


둔탁한 혀에 묶여 목구멍이 막힌 듯한 갑갑함이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내가 부르는 것이 아닌 듯 듣기 좋고 청량한 목소리가 계속 들려오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형네 부부도 목소리가 너무 맑고 좋다며 칭찬했다. 노래를 부르면서 혼자 몰래 모든 소절마다 놀라고 있었다. 신이 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여유로운 척 서툰 손으로 다음에 부를 곡을 예약했다.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그렇게 열심히 노래학원 다니더니 언제 이렇게 실력이 좋아졌대?

남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을 연신 추켜올렸다. 물론 갑자기 내가 엄청난 가수로 거듭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얼마 전의 내 상태와 비교해 보면 다른 사람의 노래로 들릴 정도로 분명 달라져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러운 내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고 함께 즐기는 것. 절대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벽을 넘어선 것이다. 어차피 나를 제외한 사람들은 얼큰하게 취해서 아무래도 좋은 시간이었겠지만, 나는 내 오랜 한계를 부지불식간에 넘어버린 충격과 짜릿함을 남몰래 만끽했다. 그러고 보니 몇 시간을 즐겁게 대화하며 보냈는데도 목이 아프지 않았다. 말하면서도 편안하고 즐거운 기분이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잘하게 되는 일은 살면서 자주 경험하기 어렵다. 안되던 것이 갑자기 잘 될 때는 특히 더 짜릿하다. 


자발적으로 새롭게 시작한 취미에서는 그런 순간들이 작지만 확실하게 찾아온다. 

긴가민가한 의구심으로 시작한 일도 그냥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하다 보니 어느새 서툴지언정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남들에게 그토록 쉬워 보여도 나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없는 취미의 영역에서 시작하면 노력을 지속하기 더욱 쉽다. 일단 한번 시작하기만 한다면 적어도 지금보다 더 나아질 일 밖에 없다는 점이 보험처럼 안심된다. 잘해보려고 할수록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 굳어버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가볍고 부담 없는 시작은 매우 중요하다. 




이미지 출처 https://pixabay.com/photos/ktv-room-karaoke-microphones-room-5936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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