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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oresta Feb 12. 2022

18.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 떠올리고 싶은 장면




새 신발을 신고 다시 길을 나섰다. 좋은 휴식 후에 내딛는 발걸음은 전보다 가볍고 힘찼다. 언제 도착할까 싶던 산티아고에 도착할 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배드버그 알레르기로 수포가 올라왔던 자리에는 이제 갈색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배드버그에 물리며 추위에 몸을 웅크리고 뜬눈으로 지새우던 밤도, 한밤중 홀로 알베르게의 도둑을 마주한 순간도, 순례자 여권을 잃어버리고 포기하고 싶어 울던 날도, 온종일 빗속을 걷고 신발이 망가진 날도, 돌아보니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순례길 모험담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지나 힘들었던 감정은 모두 마르고, 그 순간들이 지나간 모험담이 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준 이들의 선의만이 기억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였다. 보이지 않던 끝이 점차 모습을 보이자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기쁨과 '다비데와 함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슬픔이 함께 몰려왔다.


열흘 전만 해도 하루빨리 끝내고 싶던 길이 었는데, 이제는 순례길 위의 한 걸음, 한 순간이 소중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후엔 언제 다시 이 길을 걸을 수 있을지,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에 후회하지 않도록 남은 여정 동안 최선을 다해 길을 즐겼다. 아침엔 길 위의 바에 들러 카푸치노와 브리오쉬, 감자 팬케이크와 오렌지 주스를 빼놓지 않고 챙겨 먹고, 길을 걷다가 만난 노점상에 멈춰 무화과와 복숭아를 사 먹었다. 다비데와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을 듣고,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에 담았다. 그러다 얼굴이 익숙한 순례자와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 안아주고는 함께 사진을 찍었다. 순례길의 끝을 앞둔 순례자들 사이에는 들뜸과 애틋함이 섞인 공기가 맴돌았다.


다비데는 즐겁게 걷다가도 가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 눈을 바라보면 갑자기 마음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남은 시간 동안 '누가 더 많이 챙겨주나' 겨루듯 서로를 챙겼다. 옷을 공유하며 어느 순간 배낭에도 경계가 사라져서, 한 명이 지쳐 보이면 다른 한 명이 더 무거운 배낭을 지고는 도망치듯 앞서갔다. 저녁에는 스페인식 문어 요리인 뿔뽀(Pulpo)를 앞에 두고 서로 더 먹으라며 문어를 이리저리 주고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 들른 바에서 각 나라의 국기와 산티아고 문양이 함께 그려진 배지를 발견했다. 함께 걸은 길을 기념할만한 선물을 고민하던 나는 '이거다!' 싶어 몰래 한국 국기와 이탈리아 국기가 그려진 배지를 하나씩 샀다. 기회를 엿보다 '짜잔!'하고 그에게 배지를 건넨 순간, 그도 주섬주섬 한국 국기가 그려진 배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우리는 웃으며 똑같은 배지를 교환하고 배낭에 달았다. 도무지 이기기 쉽지 않은 승부였다.


산티아고 도착까지 이틀을 앞둔 날, 푸른 들판 위에 뭉개 구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나는 다비데를 멈춰 세우고 그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넸다. 한 손으론 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론 핸드폰에 저장된 음악을 틀었다.


- ♫ -


Life is moving so fast
I think we should take it slow
Rest our heads upon the grass
And listen to it grow


Going where the hills are green
And the cars are few and far
Days are full of splendor
And at night you can see the stars


Life's been moving oh so fast
I think we should take it slow
Rest our heads upon the grass
And listen to it grow


삶은 너무 빠르게 흘러

우리 조금 천천히 가야 할 것 같아

우리 머리를 풀숲에 누이고

풀들이 자라나는 소리를 듣자


언덕이 푸르른 곳으로 가자

차들은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곳

낮엔 찬란한 빛으로 가득하고

밤에는 별들이 보이는 곳으로


삶은 너무 빨리 흘러가

우리는 조금 천천히 가야 할 것 같아

풀숲에 머리를 누이고

함께 풀들이 자라는 소리를 듣자


Pink Martini, <Splendor in the Grass>


- ♫ -


<푸른 언덕이 펼쳐진 곳, 찬란한 빛으로 가득한 곳, 풀이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 곳, 삶이 천천히 흘러가는 곳> 우리는 그곳에 서서 음악을 보고, 들었다. 그날의 바람, 햇볕, 구름, 흔들리는 풀들, 함께 맞잡은 손까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최선을 다해 그 순간을 그림 그리듯 마음에 옮겨 담았다. 언젠가 마지막으로 눈을 감는 순간이 온다면 이 장면을 떠올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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