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20년.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일까?
얼마 전 미국은 9/11 기념을 맞았다.
이십여 년이 훌쩍 지났어도 미국에서는 이때가 되면 가끔 그날에 대한 회상을 하거나 관련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나는 그때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중이었어. 그러다가 갑자기 학교에서 경고등 소리가 나면서 모두에게 강당에 모이라고 하더라고. 강당에서는 교장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금 학교가 문을 닫는다고, 뉴욕이 테러리스트들에게 공격을 받았다고, 펜타곤도 공격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올지, 얼마나 더 큰 공격이 앞으로 올지 알 수 없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어. 부모님이 집에 없는 사람들은 음악실로 모이라고, 거기서 같이 부모님을 기다리자고 하셨어. 많은 아이들이 울고, 부모님들이 하나둘씩 학교에 와서 친구들을 데리고 갔어. 강당의 티브이에서는 뉴욕의 두 타워가 공격당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왔고, 사람들은 연기 속에서 재를 뒤집어진 사람들이 연상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댔어."
브로클린에서 그 당시 학교를 다녔다는 동료가 오늘 회의에서 한 말이다. 그날이 얼마나 미국인들에게는 충격의 날이었는지, 꼭 뉴욕에서 살지 않았더라도 가족이나 한 다리 건너서 실제로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근무하거나 그때 목숨을 잃은 사람을 아는 사람들도 많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은 그렇게 테러리스트들에게 공격을 당했고 그 후 어떻게 세계가 변했는지 아마 이 글을 잃으시는 분들은 다 기억을 하실 것이다. 그러나 '혹시 반지의 제왕' 영화가 같은 해 12월에 개봉한 사실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반지의 제왕을 꼽는다. 우리에게도 친근하고 많이 알려진 레골라스, 아라곤 등 아직도 이름만 들으면 영화의 장면들이 하나 둘 떠오를 정도다.
영화감독 피터젝슨은 반지의 제왕 이전에는 별 볼 일 없는 감독이었다. 반지의 제왕이 제작될 당시에 이런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고 딱히 알려진 유명 배우 없이 만든 고전, 특히 '판타지' 장르가 본전이라도 뽑을 수 있을까? 많은 영화 관계자들은 영화개봉 전 걱정이 많았었다. 그러나 개봉 후 반지의 제왕은 미국 영화계에서도 드문 박스오피스 기록을 많이 세웠다. 물론 영화의 완성도와 책이 출판된 1950년도부터의 인기도 한 목을 했겠지만, 요즘 들어서 많은 사회 학자들 중에는 영화의 성공 요소 중 하나가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화의 후속 편 이름 "Two Tower"는 더욱더 월드트레이드 센터를 떠올리게 한다.
사우론이 이끄는 오크의 군대, 흉측한 얼굴을 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괴의한 소리를 내며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는 오크족은 잘생기고 아름답게 묘사된 인간과 엘프족과는 상반된 설정이다. 우리가 항상 생각하는 선과 악은 항상 이런 식으로 묘사된다. 요즘이야 영화들이 잘생긴 선남선녀들을 빌런으로 내세우기도 하지만, 이런 서사극이나 판타지에서 악역을 맞는 배우들이나 캐릭터는 보통 사람의 형상을 하지 않은 기이하고 무서운 모습이다. 반대로 이런 악을 맞서는 선의의 캐릭터들은 유명인 또는 아름다운 사람들, 멋진 이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편에서 불의에 또는 악에 맞설 때 우리는 선과 악의 본질을 배우고, 또 우리 자신을 선의의 편 또는 최소한 악에 의해 피해를 보는 피해자들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른 악에 대항해 싸우는 아름다운 사람들 - 히어로들을 동경하게 된다.
반지의 제왕의 영향력은 영화에서 그치지 않는다. 요즘 미국 주식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다 잘 알고 있을 팔렌티어(Palantir)라는 이름도 반지의 제왕에서 나온 이름이다("seeing stone"). 가상현실 헤드폰 오큘러스를 창시한 팔머 러키가 회사를 메타(Meta)에 넘기고 세운 회사 Anduril도 역시 책에서 "아라곤의 검" 이름이다. 그 밖에도 여러 투자회사들이 반지의 제왕에서 나온 단어나 이름들을 회사 이름으로 쓸 정도로 미국, 특히 창업자들 사이에서 은근히 책의 영향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세상에 악이라고는 모르는 작고 힘없는 그러나 평화로운 호빗들에게 닥친 어두움에 맞서 싸우는 호빗들, 그리고 그들을 돕는 인간과 엘프들. 미국에서는 9/11을 겪으며 어쩌면 자신들을 샤이어에 사는 호빗들 그리고 그들을 돕는 정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사는 저 소득층, 특히 시골에서 근근이 사는 미국인들 중 밀려드는 이민자와 외국계 기업들에 의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로 자신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평화로운 우리의 땅에 밀려드는 이방인들, 그들의 다른 생김새와 문화가 낯설고 괴이해 보일 수 있겠다. 미디어에서 보이는 젊은 이들의 자유로운 옷차림이나 성별을 상관하지 않는 행동이나 모습을 보면서 이것 역시 악마(evil)의 속삭임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수년이 흐른 지금, 우리가 다시 영화를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여기저기에서 전쟁에 대한 우려 또는 바뀌는 세계관을 보며 요즘은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 구별을 하기가 힘들다. 예전에는 뚜렷하고 똑똑하게 대답할 수 있었던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역할과 행동,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한 가지 주제를 놓고 봐도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지,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연결되었는지 새삼 놀란다.
결국은 현재 시점에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는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너무 사물을 가까이서 보면 큰 그림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 다음, 그리고 그다음 세대가 옳고 그름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을까? 역사는 이기는 놈이 쓰는 것이니 어쩌면 그들도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저 만치서 모르도르 산을 바라보면서 불안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본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무거운 반지를 가슴에 품고 절대적 힘을 독제 하는 것을 막으려 모르도르로 힘겹게 향하는 호빗들을 응원한다.
대문 사진은 영국 옥셔니어 출처 - 2023년에 약 천만 원에 낙찰된 첫판 인쇄 1968년 그림책 버전
샤이어 출처 - 빌보 베긴스의 생일 파티를 재 탄생시킨 비디오 게임